❇️소그룹 목회에 대한 고백적 성찰
/ 이동원 목사(지구촌교회원로)
(이 글은 2015년 11월 16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대학교에서 열린 제2회 소그룹목회학술세미나에서 발표된 이동원 목사의 발표글이다. -코닷-)
여는 이야기, 하나.
1973년 10년여의 이민 목회를 마무리하고 교회 개척을 위해 귀국하는 발제자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땅에 이렇게 교회가 많은데 또 하나의 교회를 더 추가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이미 그때부터 이 땅에서 개신교회는 천덕꾸러기, 말썽 많은 종교 집단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무렵이었다고 회고된다. 이미 한 지역에 교회가 들어서면 주민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은 계절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름대로 내 안에서 일어난 자위적 대답은 만일 한 지역에 좋은 병원, 좋은 학교가 들어선다 해도 주민들이 그렇게 대할 것인가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주님의 몸으로서의 한 지역교회의 존재 의미는 좋은 병원과 좋은 학교를 합한 의미와도 비교될 수 없는 공동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면 그런 교회를 어떻게 세워나갈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는 명쾌한 해답을 가지지 못하였다. 다만 성경공부와 제자훈련에 힘쓰는 건강한 성경적 교회를 세우리라는 열정만은 가득하였다. 빠르게 7년여의 세월이 지나가고 있었고 개척된 지구촌교회는 2,000년을 앞두고 순전히 주의 은혜로 교인 출석만 1만명을 돌파하였다. 그러나 당시 그 교회가 개척할 때 열망했던 그런 건강한 교회였는지는 정직하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여는 이야기, 둘.
그러던 어느 날 잠실 야구장 근처를 지나다가 막 게임이 끝나고 밀려 나오는 인파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 많은 사람들은 지난 몇 시간 동안 야구장 스타디움에서 열광하며 목소리를 높이며 응원의 함성을 보내고 게임의 재미를 만끽하던 군중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과연 지난 몇 시간을 야구장에서 보냈다는 사실 때문에 지금 그들이 돌아가는 가정에서의 삶, 혹은 일터에서의 삶에 어떤 괄목할만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라는 다소 엉뚱하지만 심각한 질문이 내 안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다음에 연속으로 내 안에서 제기된 물음은 “우리 교회는 과연 다를까?”라는 물음이었다. 한 시간 내지 한 시간 반 교회당 안에서 주일 예배 혹은 수요 예배라는 형식으로 예배에 참여한 청중들 중에는 때로 그 시간에 받은 설교나 찬양의 감동으로 눈시울을 적시고 때로 웃기도 하면서 교회당을 빠져 나오지만 문제는 그들이 가정으로 일터로 돌아가면서 그들이 참여한 예배로 인해서 진정한 변화를 동반하는 삶의 모습들이 일어나고 있을까라는 물음이었다.
아니면 지난 7년간 우리 공동체는 야구장이나 극장처럼 사람을 모이게 하는 일에만 성공한 것은 아닐까라는 물음으로 한동안 발제자는 제법 심각한 자기 고뇌에 빠져 들어갔다. 그래서 <21세기 교회 비전 연구회>를 발족시키게 되었다.
여는 이야기, 셋.
교회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남녀 20여명(기획팀 10명, 중보 팀 10명)으로 구성된 이 위원회는 매주 모여 그 동안의 교회 족적을 반성하며 교회 미래의 방향 설정에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 달에 한번 정도 담임목사와 만나 담임목사의 미래 교회 구상을 청취하고 질의 응답하는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이 모임에서 한 위원의 유머로 던진 조크가 내 영혼을 더 깊은 번민 속에 빠트리게 하였다. 그것은 이제 “우리 교회는 목사님이 마음대로 목회하실 수 있는 왕국이 되셨습니다”라는 멘트였다. 정말이지 나는 지금까지 랄프 네이버가 말한 하나님의 ‘나라’(Kingdom)가 아닌 나의 왕국 혹은 나의 ‘성’(Castle) 쌓기를 위해 헌신해 온 것이었단 말인가?
한 달여 나는 이 질문과 더불어 치열한 고뇌의 시간을 가지면서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구체적 과제와 씨름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읽고 있었던 랄프 네이버의 책, “셀 교회 지침서”(Where do we go from here?)1)를 통해 21세기 우리 교회의 방향을 셀 교회로 가겠다는 결정과 목회자의 일반 은퇴 연령 70세가 아닌 65세에 은퇴하고 민주적 절차에 의해 세워지는 후임자 멘토링에 나머지 5년을 헌신하겠다는 마음의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담임 목회자만 의존하는 교회가 아닌 몸으로서의 기능이 가능한 공동체의 형성으로 교회 비전을 다음세대로 이어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2010년 12월 31일 밤 12시 약속대로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집으로 오면서 과연 우리 교회 셀 교회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라는 객관적 평가를 떠나 셀 사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더 회한 속에 맞이할 수 있었던 목회 마무리를 그래도 감사한 맘으로 마무리함을 감사할 수 있었다.
여는 이야기, 넷.
2000년 안식년으로 얼마간의 휴가를 얻은 저는 휴스턴으로 날아가 셀 교회의 아버지로 불리우던 랄프 네이버를 만나 며칠을 교제하며 많은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리고 셀 교회에 대하여 씌여진 모든 책들을 구입하여 나름의 연구에 골몰했고 귀국 즉시 2001년 한 해를 부목사님들과 셀 목회에로의 전환을 위한 토론과 연구, 준비를 시작하였다.
2002년 셀 목회에로의 전환을 선포하며, 2002-2003년 셀 교회 목자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미 좋은 소그룹 지도자(목자)가 이끄는 목장을 모범목장으로 지정하여 셀 사역의 이상적 그림을 적용하고자 하였다.
2003년 교회 모든 조직을 목장센터를 중심으로 통합하였고, 교회 내 모든 성경연구 프로그램도 목장에 합한 것은 통합하여 목장 사역에 장애가 없도록 조정하였다. 이 기간 동안 발제자는 외부 집회를 최대한 자제하며 매주 수요일 가장 좋은 오전 10시에 자매 목자, 수요 예배 후 형제 목자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2004년 5월 제1회 셀 교회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랄프 네이버, 셀 교회 연구 신학자 박영철 교수 등을 모시고 국내외, 교회 대내외, 목회자와 평신도 지도자 약1,000여명을 모시고 첫 번째 대회를 개최하여 우리 지구촌교회가 시작한 작은 실험을 한국 교회와 지속적으로 나누기로 하였다.
📌지구촌교회가 셀 목회로 전환하며 기대한 교회상
1. 건강한 교회
교회성장 운동의 대부로 불리우는 도날드 맥가브란(Donald McGavran)박사가 인도 선교의 교회 개척 경험을 기초로 미국으로 귀환하여 1960년대부터 풀러 신학교 세계 선교 대학원과 교회 성장 연구소(Institute of Church Growth)를 근거로 펼친 교회 성장 연구는 전 세계적으로 약 40년에 걸쳐 ‘성장하는 교회’의 화두를 던졌다.
아마 한국교회는 이 운동의 최대의 수혜자요, 성장 모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 근접하면서 우리는 이 운동의 역기능이 적지 않았음을 미국(대표적인 실례는 로버트 슐러의 수정교회)과 한국에서 목격하게 되었다. 교회 성장 운동이 전도와 선교에 적지 않은 긍정적 기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이 운동에 대한 성찰을 요구받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정확하게 1996년을 기점으로 소개된 독일의 크리스천 A. 슈바르츠의 NCD(Natural Church Development) 운동은 새로운 화두인 ‘건강한 교회’의 논의를 촉발시켰다. 우리는 이 운동이 건강한 교회의 질적 특성 8가지를 언급하면서 ‘전인적 소그룹’을 주목한 것을 유의해 보아야 한다. 지구촌 교회는 폭발적으로 늘어가는 교인들의 숫자에도 불구하고 교회 구경꾼이 아닌 교회 일꾼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셀 교회에로의 패러다임의 변화가 절실하다고 본 것이다.
2. 크지만 작은 교회
종종 지구촌교회가 셀 목회로 전환한 것이 양적 성장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나를 질문 받는다. 지구촌교회를 개척한 개척자로서의 대답은 우리가 셀 목회로 전환하지 않았어도 현재와 같은 3만명 출석의 목표는 달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셀 목회에로의 전환이 없었더라면 이동성장을 주로 의지해야 할 것이었지만 적어도 2005-2009년까지의 5년간처럼 ‘회심성장’(conversion growth)의 숫자가 '이동성장'(transfer growth)의 숫자를 크게 앞서는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사도행전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딤전 3:15)를 성도들은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구촌교회의 셀 교회에로의 전환은 건강한 교회에의 갈망을 기초로 주일의 대 그룹 만의 목회 경험이 아닌 셀을 통한 작은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따뜻한 교회를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그 중요한 전략 목표이었다. 그것은 크지만 작은 교회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셀 교회 신학자 빌 빅햄이 그의 저서 ‘제2의 종교개혁’에서 주일 대그룹이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라면 셀 목장의 소그룹은 내재자이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 그 이상이었다.
3. 평신도 사역자를 육성하는 교회
신약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부르고 있다.(벧전2:9-10, 계1:6) 이 ‘전신자의 제사장화’(Priesthood of all believers) 혹은 ‘만인 제사장론'은 이미 종교개혁을 통해 천명되었지만 그 적용과 실천은 오늘날 까지 미루어져 왔다.
문제는 어떻게 모든 성도들 성도다운 성도, 제사장다운 제사장으로 육성하느냐의 문제다. 이것은 신학화의 작업문제 못지않게 목회 실천적인 과제이다. 오늘 날의 교육은 ‘인지적 교육’(cognitive learning)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바로 모델링의 교육이다. 우리는 ‘들음’으로 배우기보다 ‘봄’으로 훨씬 더 잘 배운다. 유능한 전도자가 전도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 사람들은 보다 신속하게 전도자로 태어난다. 그리고 가정을 기반으로 목자를 통해 그리스도인의 가정 생활을 관찰한 성도들은 훨씬 효율적으로 성도의 행동과 삶을 모방할 수 있다. 셀 목장이야말로 그런 의미에서 평신도 사역자 육성의 가장 효율적인 모태라 할 수 있겠다. 담임 목사가 가르치는 교육만으로 평신도 사역자는 준비되지 못한다. 여러 지도자와 성도들이 소통하는 현장에서 성도들은 ‘온전해 진다’(equipping)고 믿는다.(엡4:12)
4. 전도 지향적 교회
성경은 은사로서의 전도자를 언급하기도 하지만(엡4:11), 동시에 모든 제자의 소명으로서의 전도의 과업을 가르친다.(마태28:19) 바울은 새 언약의 일군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고백하고 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롬15:16)
가장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전도하는 그리스도인이고, 가장 정상적인 교회는 전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교회라고 믿는다. 이런 모범적인 현장을 보여준 것이 사도행전의 초대 교회 현장이었다. 그들은 ‘날마다’ 성전과 집에서 모이기를 힘썼고, 그 결과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그들의 모임에 더해지게 되었다.(행전2:46-47) 그것은 그들이 부정기적으로 모이는 성전의 대그룹 모임만 의존한 것이 아니라, 날마다 이웃을 접촉하는 ‘집에서의 모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대부분의 초대 교회는 ‘집에서 모이는 교회’였다. 이것이 초대 교회를 역동적인 전도 지향의 교회가 되게 한 비밀이라면 이런 교회의 회복은 얼마나 절실한 것인가!
5. 평신도의 은사를 활용하는 교회
역동적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구경꾼이 최소화되고 모든 지체들이 일꾼들이 되어 섬기는 모습일 것이다. 이런 상황이 구성되려면 모든 지체들의 은사 활용이 전제되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은사(karisma)를 활용하지 않으면 기쁨(kara)이 없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지체들에게 자신의 은사에 맞는 섬김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교회가 주일 대그룹의 환경만을 의존하고 있다면 구조적으로 그 교회는 구경꾼을 양산할 수밖에 없다. 발제자는 그 효율적인 대안이 바로 셀 교회라고 믿는다. 보통 아주 건강한 교회도 평신도 자원의 20%정도만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80%는 구조적으로 구경꾼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10명 미만의 소그룹으로 구성된 목장에서 선교 활동이나 섬김의 봉사 활동을 나갈 경우 최소 80%인 8명은 참여할 것이다. 대그룹 구조 교회와 정 반대 현상이다.
그러나 이 80%의 참여가 극대화되려면 은사 배치 점검을 게을리 말아야 하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목자는 제공해야 한다. 지구촌 교회는 은사에 따라 모든 목장원에게 부장 직을 맡긴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은사 배치 세미나를 정례화하고 있다.
6. 온 성도가 12제자 비전을 갖고 사는 교회
랄프 네이버는 예수님과 그의 12제자들이 형성한 공동체를 가르쳐 ‘기독교 기초 동체’(Basic Christian Community) 혹은 ‘그리스도의 기초적인 몸’(Christ's Basic Body)이라고 불렀다. 혼자 모든 것을 할 수 있으신 신성을 지니신 예수님은 홀로 사역의 길을 선택하지 않으시고 팀 사역의 모범을 남기셨다. 예수님이 12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을 제자삼아 훈련하시고 다시 그들에게 전도의 과업을 맡기시며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신 것은 오늘의 우리를 향한 원형적 모범으로 믿는다.
오늘을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제자이며 예수를 따라야 한다면 제자 삼는 사역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 소명이다. 그런데 이런 소명 성취의 가장 효율적 마당이 바로 셀 사역의 현장이다. 셀은 12명 미만으로 구성되며 리더 목자는 바로 이들과 삶을 같이 함으로 선한 목자가 되어야 한다. 목자 없이 방황하고 고생하는 양 무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주님은 바로 그 후 12제자들을 부르셨다.(마태9:36-10:1)
그렇다면 제자의 사명은 목자가 되는 일이다. 셀 사역을 시작한 이래로 지구촌 교회에는 현재 목자와 미래 목자가 있을 뿐이라고 강조해 왔다. 온 성도가 12제자 비전을 갖고 사는 교회, 이것이 바로 지구촌 교회의 비전이다.
7. 주님의 지상 명령을 성취하는 교회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존재 이유는 선교이다. 교회는 단순히 선교사를 많이 파송함으로 선교적 교회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가 곧 선교사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한국의 경우에는 더 이상의 인구 증가가 없는 것이 국가적 딜레마로 대두되고 있지만 여전히 온 세상을 보면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고 기하 급수적이다.
이런 인구 증가의 대안은 폭발적인 전 세계 복음화가 유일한 대안이다. 셀 교회 연구가와 운동가들은 그 대안이 바로 ‘셀 폭발’(Cell explosion)이라고 믿는다. 셀은 분화되지 않고 뭉치면 암 세포가 된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전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모습이지만, 12명의 제자 공동체에게 이 복음화의 지상명령이 주어진 것이라면, 12명이 다시 12명을 낳는 셀이 셀을 낳는 셀의 분가야 말로 복음화의 가장 생산적 대안이다.
마태28:18-20의 지상 명령은 개인을 향한 명령이라기 보다 교회를 향한 명령으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여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푸는 밥티스마(세례/침례)의 명령과 지속적으로 제자들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양육의 명령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준행해야 할 명령이다.
마무리 성찰
오늘 한국 교회의 양적 성장은 사실상 정체기에 들어섰다. 이런 정체기를 돌파하는 전략은 갱신과 성숙의 비전뿐이다. 그러나 갱신과 성숙은 이론적 대안 제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를 사랑하는 초대 교회적 삶의 구현이 일어나지 않으면 갱신과 성숙은 공허한 구호일 뿐이다. 셀 공동체는 그런 의미에서 아직도 한국 교회의 질적 희망이라고 믿는다.
선교학자 로스 해스팅스(Ross Hastings)는 ‘미쇼날 쳐치’의 회복은 서구 교회를 다시 복음화 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믿는다. 그는 자신의 저서의 결론에서 신학자 뉴비긴(Newbigin)의 말을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마무리 도전을 남긴다:
“그의 사명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하고 그의 영이 우리의 영이심을 알자. 이제 우리 교회가 보내심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는 사명 뿐 아니라, 왕국의 현존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부름을 받고 있음을 기억하자.”
셀 목회와 셀 사역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교회의 희망이며 대안임을 믿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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