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27, 2018

히브리서는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

[권연경의 히브리서 산책] 3. 히브리서는 누구를 위한 글이었을까?

by 권연경 on 2016년 10월 13일

'히브리서’는 한 편의 장대한 설교와 같은 구성, 종교적 비유와 상징이 가득한 언어의 측면에서 신약의 다른 책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책'으로 여기지기도 합니다. 숭실대와 기독연구원 느헤미야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권연경 교수가 히브리서와 독자 사이를 연결하는 안내자로서 '히브리서 산책'을 연재합니다.

출처 미상, 목적지 미상

편지는 누군가가 누군가에게 보내는 글이다. 일기처럼 자신을 위해 쓰는 것도 아니고, 소설이나 시처럼 막연한 대상들을 생각하는 글도 아니다. 편지는 사람 사는 냄새가 가장 짙게 밴 글이다. 그래서 편지에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사람이 있고, 그걸 받아서 읽는 사람이 있다. 평범한 편지라면 그럴 것이다. 우리나라의 편지든 영어권의 편지든, 현대의 편지든 고대의 편지든, 구체적인 형식은 달라도 보내는 이와 받는 이가 등장하는 것은 어디나 똑같다. 바울의 편지가 잘 보여주는 것처럼, 이는 초대교회가 태동하고 살았던 일세기 당시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히브리서는 매우 당혹스럽다. 끝나는 모양은 분명 편지이지만(13:23-25), 시작할 때는 이야기가 다르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1:1-2).

그럴듯한 도입부도 생략한 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한 편의 장중한 설교처럼 읽힌다. 저자 자신도 이 글을 편지 대신 “권하는 말”(word of exhortation, 13:22)이라 불렀다. 하지만 누군지는 모르지만 분명 쓴 사람이 있고, 또 이 글을 받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편지는 분명하고, 그래서 편지처럼 끝이 난다. 그러니까 보내는 사람, 받는 사람, 그리고 인사말로 이루어진 통상적인 편지의 도입 형식을 과감하게 생략한 편지, 편지처럼 주고받기는 하지만 내용은 설교로 이루어진 특이한 편지인 셈이다.

도입부가 생략되었으니 당연히 보내는 사람의 이름도, 받는 사람의 이름도 없다. 그러니 서로 간 인사말도 없다. 마치 예배 시간에 많이 늦었을 때처럼, 자리에 앉자마자 바로 설교가 시작되는 모양새다. 히브리서가 신약 편지 중 유일하게 저자 미상이라는 사실은 이전 글에서 살폈었다. 정경의 형성 과정에서 이 사실은 여간 당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이 편지가 진작부터 사도 바울의 편지로 통하게 된 것도 그런 당혹감과 무관치 않다.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다. 멜기세덱에 관한 저자 자신의 표현을 패러디하자면, 히브리서는 “시작”만 없는 것이 아니라, “끝”도 없다. 쓴 사람을 모를 뿐 아니라, 받는 사람도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이 “근본 없는(?)” 편지는 게다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지도 알 도리가 없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이것이 히브리서를 둘러싼 또 하나의 수수께끼다. 신학적 독특함 면에서 독보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 편지는 과연 누구를 위해 기록된 것일까?

‘히브리인들에게’(To the Hebrews)

물론 우리에겐 ‘히브리서’라는 이름이 있다. 문자적으로는 ‘히브리인들에게’라는 뜻이다. 좀 더 길게 풀면,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된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히브리인’이라는 단어가 디아스포라 출신으로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유대인들과는 구별되는, 당시 유대의 일상어인 아람어를 사용하는 토박이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행 6:1). 하지만 ‘헬라파’ 유대인을 가리키는 단어인 ‘헬레니스테스’는 헬라어를 쓰는 유대인이 아니라 그냥 헬라인들을 가리킬 수도 있었다(행 11:20). 마찬가지로 ‘히브리파’ 혹은 ‘히브리인’(헤브라이오스)이라는 표현 역시 아람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뿐 아니라 그냥 ‘유대인’ 일반을 가리킬 수 있었다. 바울이 자신을 ‘히브리인’이라 불렀을 때도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고후 11:22; 빌 3:5). 만약 그렇다면 이 편지는 ‘히브리인들’ 곧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가 된다. 이런 작명법에 담긴 원리를 감안하면, 이는 곧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라는 말이 된다. 저자 논란이야 언제나 있었지만, 오랫동안 교회는 이 편지를 바울의 것으로 간주했었다. 그래서 바울 편지의 통상적인 작명법을 따라 받는 사람을 기준으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로마 신자들에게 보내는 로마서나 갈라디아 교회들에 보내는 갈라디아서처럼,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는 편지라서 ‘히브리인들에게’라고 부른 것이다. 만약 이것이 분명한 역사적 근거를 가진 이름이라면, 우리는 적어도 독자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답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리 간단치 않다. 우선 ‘히브리인들에게’라는 이름 자체가 어색하다. 바울은 어느 특정 지역의 공동체에 편지를 쓰기도 하고, 디모데나 디도와 같은 특정한 개인에게 편지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특정 ‘민족’ 혹은 ‘인종’을 대상으로 편지를 보낸 경우는 없다. 설사 그런 경우가 있다 하더라도, 실제 편지를 주고받자면 구체적인 한 장소에 모여 사는 유대인이라야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편지의 제목은 바울이 실제 사용하는 표현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에게”(갈 1:22)라거나,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에게”(살전 2:14) 하는 모양이 되었을 것이다. 갈라디아서처럼 그 지역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논란이 될 수는 있지만, 갈라디아가 특정한 지역이라는 사실 자체는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가 가진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바울의 편지’라는 전통적 제목은 바울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교회의 전승 과정에서 사후적으로 붙은 것이다. 이 이름이 교회의 문헌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2세기 후반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터툴리아누스에게서다. 최초의 교회사가로 알려진 유세비우스(Eusebius)의 기록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바울이 이 편지를 ‘히브리인들에게’ 히브리어로 썼고, 누가가 헬라인들을 위해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생각했다 한다. (지난 번 글에서 우리는 히브리서는 원래 헬라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언급했었다). 다른 바울 서신들과 다른 점이 많다는 사실을 의식한 설명인 셈이다. 거의 동시대 교부인 터툴리아누스도 <겸손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히브리인들에게”라는 제목을 소개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그는 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가 바울이 아닌 바나바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바울서신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사본의 하나인 파피루스 46(P46, 바울서신 전부를 담은 최초의 사본. 2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체스터 비티 사본이라고도 불린다)에는 이 편지가 로마서와 고린도전서 사이에 등장한다. 이 ‘히브리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바울의 저작으로 간주했다는 뜻이다(바울서신 내 이 위치는 대략적인 길이를 고려한 것이다. 다른 심오한 배열 원리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사본에서나 교부들의 글에서 등장하는 이 제목은 원문 일부가 아니다. 그러니까 ‘히브리인들에게’라는 초기의 제목은 분명한 물증에 바탕을 둔 결론이 아니라, 히브리서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사후적인 추론이다. 편지를 읽어 보니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 같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추론은 얼마나 그럴듯한 것일까? 사실 이 물음과 더불어 우리는 히브리서의 저자나 독자에 관한 ‘서론적’ 물음에서 히브리서의 실제 논증에 대한 해석의 영역으로 접근한다. 히브리서 본문을 읽고 “누구를 위한 글일까?” 하는 물음의 답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한 것일까?” 하는 물음과 그리 멀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호소?

당연한 말이지만, 고대 교회가 공연히 ‘히브리인들에게’라는 제목을 달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히브리서 안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독자라고 추정하게 하는 흥미로운 특징들이 상당히 많다. 무엇보다 먼저, 편지 시작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등장하는 구약의 인용구들을 언급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구약성경을 대거 동원한다. 특정 구절이나 에피소드를 명시적으로 인용할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당연히 알 만한 지식으로 구약의 이야기들을 전제하기도 한다. 그리고 때론 저자 자신의 설명은 거의 생략된 채 구약 본문만 메들리로 이어지기도 한다. 11장에서 구약의 유명한 인물들을 대거 열거하며 그들의 믿음을 칭송하는 것에서 보는 것처럼, 분명 저자는 구약을 잘하는 독자들을 상대로 말을 걸고 있다.

또한, 히브리서에는 구약의 제사제도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광야의 성막의 구조와 거기서 이루어지는 제사 및 그 제사를 수행하는 제사장 직분에 관한 긴 설명과 논증이 등장하는가 하면, 시내산 언약에 관련된 이야기도 길게 등장한다. 7장에서 멜기세덱 계통을 레위 계통과 대조하며 그리스도와 연결하는 논증 방식도 성경을 잘 모르는 독자들이라면 무척 생소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이다. 히브리서의 이런 특징은 독자들이 성경의 본문과 이야기들을 익숙하게 알고 있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가정하면 쉽게 설명이 된다(딤후 3:15 참고). 이방인 독자들을 신앙적으로 훈계하기 위해, 굳이 지나간 옛 언약 이야기를, 그것도 이렇게 상세히 소개할 필요가 있었을까?

더욱이 구약성경을 기초로 주장을 펼치는 방식 역시 당시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성경해석 방식인 경우가 많다(학자들은 ‘페세르 해석’이나 ‘미드라쉬’ 등의 용어를 사용한다). 가령, 심판에 대한 경고에서 나타나듯, 저자는 ‘가벼운 것에서 무거운 것에로’ 이행하는 논증을 즐겨 사용한다(1:4; 2:2-4; 9:13-14; 10:26-31; 12:9, 25). 히브리어로 ‘칼바호메르’(가벼움과 무거움. 라틴어로는 a minori ad maius)라 불리는 해석 방법이다. 또 성경의 특정 구절에 나오는 단어의 의를 설명하기 위해 그 단어가 등장하는 다른 구절을 연결하기도 한다. 가령 4장에서 시편 95편의 ‘안식’을 설명하기 위해 같은 단어가 등장하는 (칠십인역) 창세기 2장 2절을 동원한다(히브리어 본문에서는 단어가 서로 다르다). 또 시편에 기초하여 예수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설명하기 위해 멜기세덱이 처음 등장하는 창세기 14:17-20절을 불러오기도 한다(5:6, 10; 6:20). 이는 ‘게제라 샤와’라 불리는 유비적 해석법이다. 또한, 본문의 침묵을 명시적 부정으로 해석하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나 다른 계통에 관해 소개된 것이 없는 멜기세덱은 아예 시작과 끝이 없는 존재가 되고(7:3), 그의 죽음에 관한 성경의 침묵은 그가 “살아있다고 증거를 얻은” 것으로 해석된다(7:8). 이런 성경 해석 방식은 당시 유대인들의 성경읽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형적인 유대적 해석 방법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더 의미심장한 것은 이런 구약 혹은 첫 언약의 주제들이 히브리서의 기독론적 주장과 얽히는 방식이다. 히브리서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다. 이 그리스도는 ‘새 언약’의 중보로서, 여러 가지 한계가 뚜렷했던 옛 언약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리스도는 첫 언약의 계시전달자들인 선지자들보다(1:1-2), 율법을 전해준 천사들보다(1:4-14), 그리고 시내산 언약의 중보였던 모세보다 더 큰 분이시다(3:1-6). 그는 모세나 여호수아가 주지 못했던 안식을 주는 분이시며(3:7-4:11). 그는 연약함에 둘러싸인 구약의 제사장들보다 더 훌륭한, 멜기세덱의 계통을 이어받은 새 언약의 제사장이다(5:1-10, 11; 6:20; 7:1-28; 8:1-10:18). 그리스도가 참된 구원의 중보자임을 선포하기 위해, 이방인들에게는 생소했을 가능성이 높은 ‘유대적’ 주제들을 굳이 끌고 올 필요가 있었을까? 오히려 첫 언약보다 더 나은 새 언약을 반복적으로 묘사하고, 그리스도께서 구약과 시내산 언약의 수종자들보다 더 탁월한 분임을 거듭 강조하는 모습은 무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처럼 첫 언약과의 관계를 분명히 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 처한 독자들은 바로 그 첫 언약의 백성들, 곧 유대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심판에 대한 경고 역시 동일한 대조 패턴을 보여준다. 구약을 엄한 심판과 연결하고 새 언약의 복음을 ‘용서’와 연결하는 항간의 경향을 생각하면, 심판에 대한 히브리서의 논증은 매우 인상적이다. 저자의 논증은 간단하다. 열등한 중보자를 가진 첫 언약의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 중재 되는 새 언약의 구원이 훨씬 더 크다. 그런데 훨씬 열등한 첫 언약의 율법도 확실한 효력을 가진 것이어서 이를 어긴 사람은 용서받지 못하고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 그렇다면 그보다 훨씬 더 큰 새 언약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같이 큰 구원을 소홀히 여긴다면” 얼마나 더 큰 심판을 받겠는가?(2:2-4; 10:26-31; 12:25). 이런 식의 논증 역시 첫 언약과 율법의 엄한 요구를 잘 아는 유대 독자들에게 더 효과적인 권고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유대인 독자들을 떠올리게 하는, 더욱 소소한 흔적들도 있다. 가령,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천사들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같이 “혈과 육을 가진” 존재, 곧 죽음의 공포 아래 살아가는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2:14-15). 그런데 이어서 저자는 천사와 대조되는 자리에 “사람” 대신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뜻밖의 표현을 사용한다(2:16). 이런 현상은 저자가 생각하는 “사람”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쉽게 이해된다. 더욱이 여기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붙들어 준다”는 표현은 이사야 41장 8-10절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데,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친구로 명명된 아브라함의 후손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 나의 종”이요 “내가 선택한 야곱”이다(사 41:8). 이런 식의 표현들은 지금 저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논의를 펼치고 있다는 추정을 매우 그럴 듯한 것으로 만든다.

유대교로 돌아가지 말라?

이쯤 되면, 히브리서의 독자들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결론은 거의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것이 대부분의 학자가 가진 생각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저자는 그의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물론 독자를 “유대 그리스도인”으로 특정한다고 해서 저자의 주장이 바로 선명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편지의 전체적인 흐름을 훑어보면 그의 중심적 메시지는 꽤 분명해 보인다. 저자는 옛 언약의 체제를 끊임없이 언급하고, 이를 새 언약과 비교하면서 연신 새 언약의 탁월함을 강조하다. 그의 주장은 한 마디로 새 언약이 옛 언약보다 ‘더 좋고’ 새 언약의 중보자 그리스도는 옛 언약의 중보자들보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10장 중반까지 이어지는 긴 신학적 논증을 막 마무리하고 난 다음, 이 논증에 근거한 실천적 권고를 이어가던 저자는 ‘믿음’으로 살게 될 사람과 ‘뒤로 물러가’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사람에 한 하박국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호소한다.

우리는 뒤로 물러서다 멸망할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목숨을 얻을 사람들입니다(10:39).

만약 독자들이 유대인으로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고백하게 된 무리라면, “뒤로 물러선다”는 것은 예수를 믿기 이전의 삶, 곧 율법과 성전 제의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라는 예전의 삶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저자는 첫 언약보다 훨씬 더 좋은, 아니 첫 언약을 완성하고 넘어서는 새 언약의 울타리로 들어왔다가 다시 과거의 유대교 시절로 “물러나는” 이들을 향해 호소하는 셈이다. 한 마디로 유대교적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올바른 해석이라면, 이와 유사한 다른 경고들 역시 동일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들을 통해) 들은 말씀을 더욱 마음에 새겨서 (그 말씀으로부터)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주의합시다(2:1).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아직 남아 있지만, 여러분 중에 혹 (이 안식에) 이르지 못할 사람이 있을까 두렵습니다(4:1).

이렇게 보면, 얼핏 수수께끼 같은 6장의 권고 역시 매우 구체적인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5장 끝에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유나 이유식밖에 먹을 수 없는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지 말고, 어른들의 음식을 먹는 성숙한 존재가 되라고 호소한다(5:11-14). 그리고 6장을 시작하며 이렇게 권고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에 관한 초보적 가르침을 벗어나 성숙함을 향해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과 하나님을 향한 믿음, 세례들[씻는 의식들]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기초를 다시 닦으려고 하지 맙시다(6:1-2).

여기서 저자가 “초보적 가르침”으로 열거하는 항목들은 그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기본적 주제들이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이 주제 중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항목은 없어 보인다. 잘못된 과거로부터의 회개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구약과 유대교 신앙의 기본이다. 정결 의식들이나 안수 역시 유대적 의식 일부였고, 영원한 심판 역시 유대교의 기초가 되는 신학적 주제 중 하나였다. 그나마 가장 기독교적으로 보이는 것이 “죽은 자의 부활”인데, 이 역시 보다 일반적인 의미의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기독교 이전의 유대 사회에 널리 퍼진 기대였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사두개인들은 사후의 부활을 부정했지만,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바리새인들은 부활에 대한 분명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눅 20:27-40; 행 4:2)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런 초보적인 가르침들을 “떠나라”고 혹은 “뒤에 남겨 두라”고 호소한다. 그리고 “성숙함” 혹은 “완전함”을 향해 나아가자고 말한다(6:1, 원문에서는 “나아갑시다” 하는 호소가 1절에 속한다). 더 완전한 곳으로 나아가자는 권고는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초보적인 가르침들을 “버리자”는 권고는 의아하다. 이 동사는 사물이 목적어가 될 때, “버리다, 없애다” 혹은 “내버려두다” 등의 의미로 사용된다(가령, 마 4:20, 22; 5:24), 하지만 복음의 초보적인 가르침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버려야” 할 그물 같은 것은 아니다. 기본적인 사항일수록 더 중요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런데 저자는 그 초보적 가르침을 버려두자고 말한다. 저자의 이런 의아한 권고는 지금 독자들이 새 언약의 삶을 포기하고 다시 유대교의 패러다임으로 “물러나려” 하고 있다면, 그리고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역회심”(counter-conversion)이 사실상 배교와 다름없는 결과를 낳을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보다 쉽게 이해가 간다. 기독교 복음의 기초를 떠나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새 언약 아래서의 건강함과 성숙함을 방해하는 유대교적 패턴의 울타리를 벗어나자는 말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질문이 생긴다. 이 편지의 독자들은 왜 예수 그리스도와 새 언약의 복음을 버리고 다시 유대교 시절로 돌아가려 할까? 그들이 신앙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그리고 유대교에서 해답 혹은 피난처를 찾게 만드는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점에서 그런 어려움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다. 당혹스럽게도, 막상 이 질문과 관련하여 본문이 보여주는 이런저런 흔적들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결론과 잘 안 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 때문에 히브리서의 독자들을 비유대인 회심자들로 상정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물론 그런 입장을 가진 학자들은 유대 그리스도인 독자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보이는 여러 특징을 사뭇 방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이들의 설명은 또 그 나름의 설득력과 아쉬움을 보여준다. 다음 글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구체적으로 독자들은 어떤 어려움에 처해 있었을까? 만약 히브리서의 독자가 유대 신자들이 아니라면, 히브리서의 “유대적” 특징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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