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지금도 병을 고치시는가?
/ 존 맥아더 목사 (Grace Community Church)
호바트 프리먼(Hobart Freeman)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소아마비를 치료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다리 한 쪽은 여전히 작아서 특별히 제작된 신발을 신어야 했으며 걸을 때마다 매우 힘들어 했다. 프리먼은 목사였다. 그는 침례교에서 사역을 시작했고 정통 교리에 입각한 훌륭한 저서, '구약선지서 개론(An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에 프리먼은 신유의 기적에 매료되어 은사주의 운동에 휩쓸리더니, 점점 더 엉뚱한 방향으로 가 버렸다. 그는 인디아나 주의 클레이풀(Claypool)에 신앙 공동체로 알려진 자신의 교회를 세웠는데, 그 성도가 2,000명에 이르렀다. 그 집회는 프리먼이 영광의 창고(The Glory Barn)라고 이름 붙인 건물에서 열렸는데, 회원이 아니면 절대로 그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프리먼과 신앙 공동체 회원들은 현대 의술이 고대 마술과 사교에서 나온 것으로 믿으며, 따라서 의학적인 치료를 아주 경멸했다. 프리먼은 의사의 치료를 받는 것은 곧 마귀의 세력에 빠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프리먼의 공동체에 속한 산모들은 병원 분만실이 아니라 그 교회가 후원하는 산파들의 도움으로 집에서 출산해야 한다고 한다. 이 가르침에 순종하려다 많은 산모와 아기들이 목숨을 잃었다. 몇 년 동안 적어도 90명 정도의 회원들이 치료만 받으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병이었지만 죽어갔다. 전세계에서 프리먼의 가르침대로 따랐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신앙 공동체에 속한 어떤 부모는 15살 된 딸을 병원에서 치료만 받으면 충분히 고칠 수 있었던 병이었는데 죽게 해서 결국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어 10년 간 감옥살이를 했다. 프리먼 자신도 이 재판에서 살인을 방조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1984년 12월 8일, 프리먼은 다리 종양 합병증에 의한 폐와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호바트 프리먼은 자신의 잘못된 신학 때문에, 소아마비로 인해 그의 한쪽 다리가 불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다. 그는 누가 그의 육체적인 결함과 그의 가르침이 모순된다고 지적하면, “내가 나를 치료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분명한 약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그는 자신을 죽이고 있는 그 질병을 치료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다. 현대 의학은 충분히 그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도 있었다. 결국 프리먼은 자신의 가르침의 희생양이 되었다.
소위 신유 은사자라는 사람들 가운데 치료를 받지 않아 죽은 사람은 프리먼 뿐만이 아니다. 윌리엄 브랜험(William Branham)은 2차 대전 후에 신유 은사를 복고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지금까지 은사주의 운동 내에서 가장 진기한 신유의 기적들을 행한 사람으로 꼽히는데, 1965년 56세의 나이에 교통 사고로 엿새 동안 앓다가 결국 죽었다. 그의 추종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키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결코 부활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천막 전도자이자 신유 은사자로 유명한 알렌(A.A. Allen) 역시 다른 사람들은 치료하면서도 자신은 수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알콜 중독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1967년에 간경화로 죽었다. 캐서린 쿨만(Kathryn Kuhlman)은 1976년 심장 질환으로 죽었는데, 그녀는 20년 동안 심장병을 앓았었다. 루스 카터 스태풀턴(Ruth Carter Stapleton)은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누이로서, 그녀 역시 신유 은사자였는데 신유에 대한 그녀의 신념 때문에 암 치료를 거부했으며 결국 1983년에 그 병 때문에 죽었다.
존 윔버(John Wimber)도 만성적인 심장 질환을 앓고 있다. 그의 책「능력 치유」(power Healing)는 “존 윔버의 개인 노트”(A Persomal Note from John Wimber)라는 글로부터 시작한다.
"1985년 10월, 3주간 영국에 있으면서 런던, 브리튼, 그리고 쉐필드의 집회를 인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치료를 받았다. 단지 나 한 사람만을 빼고...지난 2년 동안 나는 4-5개월마다 찾아오는 가슴앓이로 고생했다. 나는 심장 쪽이 의심스러웠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심지어는 내 아내 캐롤조차도 내 상태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런데 영국에서 더 이상 그녀에게 감출 수가 없었다. 우리가 산책할 때 이따금씩 가슴이 아파서 갑자기 멈춰 서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잦은 여행으로 피로해 있었다. 의사들은 내게 심장마비 증세가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서 종합 진단을 받아 보니 역시 내가 염려했던 대로였다. 심장이 극심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진단 결과에 의하면 내 심장은 제대로 뛸 수조차 없었고 고혈압으로 인한 합병증까지 있었다. 비만과 과로에다 이런 병까지 앓게 되었으니, 언제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존 윔버는 하나님께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아브라함이 그의 아이를 기다린 것같이 자기도 치료되기를 기다려야 하며, 동시에 자기 주치의의 지시대로 따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이후로 윔버는 치료를 받아 병이 호전되었는데,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가 점차 치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고 믿었다. “지금 내가 완전히 치료되어 더 이상 문제가 없다고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사실이 그렇지 않은데 그렇다고 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윔버는 솔직하게 시인했다.
신유의 기적을 베풀고 다니는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스스로 신유를 필요로 하는가? 신유 은사자 찰스 캅스(Charles Capps)의 딸이자 자신도 신유 은사자인 아넷트 캅스(Annette Capps)는 자신의 책, '당신의 몸과 감정의 재앙을 역전시키라 (Reverse the Curse in Your Body and Emotions)'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사람들은 소위 “신유 은사자”들이 나중에 병들거나 죽게 된다는 사실 때문에 시험에 들곤 한다.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이 치료되는데, 왜 그 자신들은 병들어 죽는가?”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집회 중에 일어난 그 신유의 기적들이 성령의 특별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기 스스로 믿고 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신유의 은사를 받고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받는 전도자라도, 자기 몸이 치료받고 건강하기 위해서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유의 은사는 그 사역을 하고 있는 당사자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몇 해 동안 사역을 하면서 나를 통해 신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많이 보았지만, 나 자신의 치료를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내가 스스로 믿고 구해야만 했다. 나 자신이 병에 걸려 힘들게 지내는 동안에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통해 치료받은 경우가 허다했다. 나 자신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구해야 했던 것이다.
그녀의 결론은 정말 놀랍다. 만약 신유 은사자가 병들었다면 그것은 자신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신유의 은사에 대한 견해는 신유 은사자마다 각각 다른 것 같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치료하시기를 원하신다고 하고, 다른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의 질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들은 병이 죄 때문에 생긴다고 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영적으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 왜 육신의 병에 걸리는가를 설명하려고 애쓴다. 어떤 사람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데 또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이 비상한 신유의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께서 믿음의 도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들을 사용하셨을 뿐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직접 안찰하거나 기름을 바르는데 어떤 사람들은 단지 치료될 것을 선포하고 “기도하기만 해도 낫는다”라고 한다.
오랄 로버츠(Oral Roberts)는 한때 하나님께서 자기더러 큰 병원을 짓고 일반적인 의술과 신유의 기적을 병용해 사람들을 고치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자, 하나님께서 병원 문을 받으라고 말씀하셨다고 했다. 나는 최근에 거기에 가 보았다. 기도하는 손이 새겨진 조각상이 우뚝 세워져 있었는데 실제로 건물은 텅 비었고 잡초만 무성했었다. 그것은 성취되지 못한 신유의 약속에 대한 기념비였다.
병고침과 은사주의 운동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찰스 팍스 파햄(Charls Fox Parham)은 신유의 기적이야말로 모든 참 신자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 신념을 근거로 오순절 신앙의 모든 체계를 수립했다. 에이미 셈플 맥퍼슨, E.W.케년, 윌리엄 브랜험, 캐서린 쿨만, 오랄 로버츠, 케네스 하긴, 케네스 코퍼랜드, 프레드 프라이스, 제리 셰빌, 찰스 캅스, 노블 에이스, 로버트 틸턴, 베니 힌, 그리고 래리 리, 이 모든 사람들이 집회 때마다 신유를 내세운다. 신유의 은사를 로마 카톨릭 전통의 연장으로 보는 카톨릭의 은사주의자들, 즉 존 베르톨루치(John Bertolucci) 신부와 프란시스 맥넛(Francis MacNutt) 역시 마찬가지이다. 존 윔버를 위시해서 제 3의 물결 지도자들 역시 병고침을 주 종목으로 삼고 있다.
신유 은사자들의 주장과 방법들은 정말 엉뚱하기 짝이 없다. 몇 해 전에 어떤 신유 은사자로부터 “기적의 기도 손수건”이라는 것을 받았다. 거기에는 이런 내용의 글도 함께 있었다.
"오늘 저녁 이 기적의 기도 손수건을 베개 밑에 두고 주무십시오. 아니면 몸에 지니거나 당신이 좋아하는 곳에 두십시오. 아픈 곳이 있으면 거기에 덮으십시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그 손수건을 녹색 봉투에 넣어 내게 보내십시오. 이 손수건을 가지고 있지 말고 꼭 보내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내가 그것을 들고 밤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기적 같은 능력이 강같이 흐를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유익하고, 당신의 필요에 합당한, 특별한 기적을 준비하셨습니다."
흥미롭게도 그 기도 손수건을 보낸 사람은 자기 방식에 대해 성경적인 근거가 있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에베소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특별한 기적을 행하셨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행 19:12).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바울과 다른 사도들이 받은 능력은 특별한 것이었다. 신약성경 어디에서도 그 밖의 다른 사람이 손수건을 보내 신유의 기적을 행했다는 말이 없다.
케네스 하긴(Kenneth Hagin)은 내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이상한 방법을 쓰는 어떤 신유 은사자에 대해 말했다.
그는 항상 각 사람들에게 침을 바르곤 했다. 손에 침을 뱉아 사람들에게 바르는 것이 그의 일이다. 만약 누가 머리가 아프면 손에 침을 뱉아 이마에 바른다. 배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역시 손에 침을 뱉아 옷과 배에 바른다. 모류에 문제가 있으면 손에 침을 뱉아 무릎에 문지른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치료된다.
그 밖에도 다른 많은 희한한 광경들이 매일 기독교 TV 방송에 나오고 있다. 오랄 로버츠(Oral Roverts)는 “믿음의 씨 헌금”을 바치라고 한다. 이것은 신유의 기적에 대한 착수금이라고 한다. 로버트 틸턴(Robert Tilton) 역시 그에게 돈을 보내는 사람은 특별한 병고침의 역사가 일어나며, 재물의 축복도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한다. 돈이 많으면 많을 수록 기적도 더 크다고 한다. 팻 로버트슨(Pat Robertson)은 카메라를 들여다보면서 누군가의 거실을 보고 있다고 한다. 그는 그 순간에 거기서 치료받고 있는 사람을 직접 보고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베니 힌(Benny Hinn)은 최근에 신유 은사자이자 트리니티 방송국의 대담 진행자인 폴 크로우치(Paul Crouch)를 치료해 주었다고 한다. 베니 힌이 집회에 모인 사람들에게 기름을 뿌리자, 크로우치가 앞에 나와서 수년 동안 앓던 이명증이 기적적으로 치유되었다고 간증했다.
신유의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은 믿기 어려울만큼 환성적인데다, 그야말로 밑도 끝도 없다. 하지만 진짜 기적이라고 여길 만한 증거는 없다. 내가 참석한 곳마다 신유의 기적들에 대해 회의를 갖게 했을 뿐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 놀라운 은사들을 지금도 주시는가? 시시콜콜한 병고침은 도대체 무엇인가? 온통 혼란과 회의, 모순만 가득할 뿐이다.
성경을 연구해 보면 성령의 은사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에베소서 4장에 은사받은 자의 종류에 대해 나와 있다. 사도, 복음 전하는 자, 목사, 그리고 교사이다. 이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첫 번째 선물이다.
둘째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지금까지도 계속되는 은사로서 지혜와 지식, 예언(권위 있는 선포), 가르침, 권면, 믿음(혹은 기도), 분별, 구제, 다스림, 긍휼이 여기에 해당한다(롬 12:3-8; 고전 12:8-10, 28).
셋째는 표적을 위한 일시적인 은사들로서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초대 교회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어질 때, 그 진실성과 확실성을 보증하기 위한 목적에서 몇몇 신자들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들을 가리킨다.
예언(계시적 예언), 기적, 신유, 방언, 그리고 방언 통역 등이 일시적 표적 은사에 해당한다. 표적 은사의 목적은 단 한 가지이다. 즉 사도들에게 신임장을 주어 사람들로 하여금 이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으로 기록된 후에는 이 표적 은사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으므로 이제 이 은사들은 끝났다.
무엇이 성경적인 기적의 은사였는가?
기적과 병고침은 모두 하나님의 계시를 확증하기 위해 주어진 특별한 표적 은사들이다. 기적은 병고침을 포함하고, 신유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치료했다는 것 자체가 증거이므로, 이 두 가지 은사는 어떤 의미에서 중복된 것이다.
가장 위대한 기적을 행한 사람은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께서는 근본적으로 세 가지 형태의 기적을 행하셨다.
병고치심 (최고의 신유 기적이라 할 수 있는 죽은자를 살리시는 것을 포함하여), 귀신을 쫓아내심 (그 결과 병이 나음), 그리고 자연의 기적 (오병이어, 바다를 잠잠케 하심, 물 위를 걸으심)이다. 복음서에는 이와 같은 예수님의 기적들로 가득 차 있다.
요한은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라고 했다(요 21:25). 이 모든 기적들은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이라고 하신 자기주장이 진실 된 것이었음을 보여주는 표적들이다(요 2:11; 5:36; 20:30-31; 행 2:22).
그리스도의 사역이 끝난 후에는 사도들이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고 성경에 기록하는 일을 맡았다. 그들의 사역이 믿을 만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그러나 신약 어디에서도 예수님 외에 누가 자연의 기적을 행했다는 말은 없다. 사도들도차도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바다를 잠잠케 하거나 물 위를 걷는 기적을 행하지 못했다(베드로가 한 번 물위를 걷기는 했지만, 그때는 예수님께서 곁에서 그를 도와주셨다. 그 외에는 베드로가 그런 체험을 다시 하지 못했다).
기적에 관한 논의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은사 Ⅰ 5장 참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은 오직 사도들과 그들의 동역자들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마태복음 10:1에서 예수께서는 단지 열두 제자들에게만 이런 능력을 주셨다.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성령이 강림하고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어도 사도들은 여전히 이 초 자연적인 두 은사를 행했다. 사도들의 기적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보였던 그 기적들을 연상케 한다.
“사도의 표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그 당시 기적들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제한된 것이었다. 비록 사도들에게 위임받아 기적을 행한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예를 들면 빌립<행8:6-7>의 경우), 기적의 은사가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막 16:20; 히 2:3-4).
위펄드(B.B.Warfield)가 기적의 은사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
"초대 기독교인들이 모두 기적의 은사를 받은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사도 시대에 있어서 기적을 행하는 것 자체가 의미 있었던 것도 아니다. 기적들은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사도들이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은, 믿을 만한 대리인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 기능은 오직 사도 시대의 교회에만 해당하는 것이므로, 사도 시대가 끝나면서 자연히 이 은사도 사라졌다."
기적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 뒤나미스(dunamis)의 문자적인 의미는 “힘”이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18번 사용되었고, 동사로는 209번 쓰였다. 이 단어는 고린도전서 12:10에 “기적을 행함” (문자적으로는 “강한 역사를 이루는 힘”, 개역성경에는 “능력을 행함”으로 되어있음- 역자 주)이라는 표현과 같이 기적 은사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뒤나미스(dunamis)는 복음서에서 “능력”이라는 말로 번역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능력”의 은사를 가리키는 것인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의 모범을 통해 우리는 그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그의 공생애 중에 사탄을 대적하셨고, 그의 뒤나미스 즉 그의 능력으로 귀신을 물리치셨다(눅 4:13-14). 예수께서는 그의 “능력”으로 여러차례 귀신을 쫓아내셨다(마 8,9,12; 막 5,6,7; 눅 9장). 어떤 경우에든지 예수께서 사탄의 나라를 쳐부수기 위하여 능력의 은사를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능력”의 은사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도들과 빌립이 바로 이런 일을 했다(행 19:12; 8:6-7).
따라서 사도들의 기적은 병고침과 귀신 쫓아내는 것에만 해당한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이 병고침과 귀신 쫓아내는 것 외에 자연에 대한 기적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전례가 없는 이야기이다. 더구나 그런 주장들은 기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도 맞지 않는다. 그 목적은 새 계시를 성경으로 확증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서 귀신을 쫓는 사람을 찾아다녀야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고린도후서 2:10-11, 에베소서 6:11-18, 디모데후서 2:25-26, 야고보서 4:7, 그리고 베드로전서 5:7-9의 말씀대로만 따라 하면 된다. 이 성경 말씀들은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잘 가르쳐 주고 있다.
기적의 은사가 병고침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질병이 사탄이나 귀신 때문에 생겼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질병-범우주적인 문제
에덴동산의 타락 이후 질병은 인류에게 끔찍한 현실이었다. 수천년 동안 아담 이후 인류는 질병과 고통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왔으며, 어느 누구도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피하지 못했다. 오직 에녹과 엘리야만이 죽음을 면하였다(창 5:24; 왕하 2:11). 오직 예수님만이 죽음을 이기고 영광중에 부활하셨다. 이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다 일정한 수명 동안만 살 뿐이다. 수백만의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어떤 이는 병으로, 어떤 이는 다쳐서, 또 어떤 이는 노쇠하여 죽었다.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병고침의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까지도 예외일 수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나더러 내게 주어진 은사 이상의 영적 은사를 하나 더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병고침의 은사를 구하겠다. 내가 병을 고칠 수 있기를 바란 것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눈물 흘리는 부모와 함께 있은 적도 있었다. 불치의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를 위해 기도한 적도 있었다. 한 젊은이가 중환자실에서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을 때, 나는 손도 쓰지 못하고 그저 서 있기만 한 때도 있었다. 십대의 청소년들이 교통 사고로 죽는 것을 보기도 했다. 병실의 기구들을 통해 살아 있다는 표시만 보일 뿐 혼수 상태로 누워 있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내 친한 친구가 심장 이식 수술의 실패로 결국 생명을 잃은 것도 목격했다. 수술 때문에 아주 고통스러워하는 친구들을 만난 때도 있었다. 질병이나 부상으로 영원히 불구가 된 사람들도 알고 있다. 선천적으로 심장 질환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이도 보았다. 절개 수술이나 사고로 신체 일부를 절단한 사람들을 도와준 적도 있었다. 이런 일들을 당할 때 오직 내가 원하는 것은, 말 한 마디로, 한번 만지기만 해서, 단번의 명령으로 이들을 치료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신유의 은사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보람있는 일이겠는지를 생각해 보라!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가서 그저 만지기만 하면 그들이 낫는다고 생각해 보라. 얼마나 놀랍겠는가! 신유 은사를 받은 사람들을 다 모아서 질병 투성이인 이 세상에 파송한다면 정말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그들이 사람들 사이를 다니면서 암 환자, 결핵 환자, 에이즈 감염자, 그리고 그 외 여러 가지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할 수 있으련만...
왜 신유 은사자들은 그런 시도를 하지 않는가?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정말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먼저 가까운 병원과 요양소에 가서 이 일을 시작하고 점점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계속할 수 있지 않겠는가? 만약 은사주의자들이 종종 주장하는 것처럼 그런 기적들이 불신자들을 믿게 하기 위한 기사의 이적이라고 한다면 이 일이야말로 그 목적을 달성하는 데 있어서 최상의 방법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신유 은사자들은 좀처럼 자신들의 집회 장소나 TV 방송국의 스튜디오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항상 일정한 장소에서 각본대로 정해진 절차대로만 그 은사를 사용한다.
왜 병원에서 그 은사를 사용했다는 말이 들리지 않을까? 신유 은사자들이 인도나 방글라데시의 길거리에서 그 은사를 행한다면 오죽 좋겠는가? 왜 그들은 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나환자촌이나 에이즈 환자 수용소에 가지 않는가?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왜?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그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신유의 은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 나타낸 일시적인 기적 은사이다. 일단 그것이 입증되었으므로 신유의 은사도 그친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비록 하나님께서 우리 몸에 관심을 가지고 계시기는 하지만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신다(마 10:28). 우리는 비록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처럼 모든 사람들을 다 치료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을 본 그들이 한 일은 무엇이었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신유의 기적을 여러 번 행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었는가? 사람들이 그들을 가두고 핍박하며 심지어는 죽이지 않았는가? 구원은 결코 체험이나 육체적인 치료를 목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은 오직 복음을 듣고 믿음에서 생기는 것이다(롬 10:17).
그런데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단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이교도들 안에도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로마 카톨릭 교회가 치유의 능력을 주장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들은 세례 요한이나 베드로의 유골, 십자가의 조각들, 심지어는 마리아의 젖병 따위로 사람들을 치유한다고 선전했다. 루데(Lourdes)라는 사람은 프랑스의 한 카톨릭 성당에서 기적적인 치유가 엄청나게 일어난 현장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유고슬라비아의 머듀고르(Medjugorje)에 의하면 적어도 10년 동안 천오백만 명 이상이 치유되었다고 한다. 그들은 1981년에 동정녀 마리아가 여섯 명의 아이들에게 나타나면서 기적과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한다.
동양의 심령 치료사들은 “피 흘리지 않는 수술”을 할 수 있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단지 병든 부위 위에서 손을 움직이고 주문을 외면 사람이 낫는다고 한다.
심지어 주술사나 무당들도 죽은 사람을 살린다고 말한다. 마술사들은 치료할 때 기적이 나타나는 것처럼 꾸미기 위해 교묘한 마술을 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의 창시자인 메리 베이커 에디(Mary Baker Eddy)는 텔레파시로 사람을 치료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탄은 항상 신유의 기적을 모방함으로써 사람들을 조종한다. 한때 강신술사였다가 지금은 기독교로 개종한 라파엘 가슨(Raphael Gasso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늘날 사탄의 힘에 의해 놀라운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 나 역시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나는 강신술사들의 ‘치유 집회’에서 일어난 놀라운 치유의 기적들을 분명히 본 적이 있다.”
일부 기독교에서, 특히 오순절파와 은사주의자들이 치유의 능력을 주장한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를 켜 보라. 어떤 누군가가, 비록 녹화된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당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언젠가 자기 부인이 어느 목사에게서 기적같이 암 치료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과 이런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부인은 어떠신가요?”
“그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아니, 죽다니요? 병고침을 받은 지 얼마만에요?”
“일년만에요.”
이런 이야기들이 이 운동에는 허다하다. 케네스 하긴은 귀머거리였다가 신유 집회에서 완전히 치료받았다고 하는 어떤 목사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집회가 끝날 무렵이 되자 그는 다시 들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다시 보청기를 켰다”
은사주의 TV프로그램을 보면 그들이 얼마나 기적과 신유에 심취해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잘 알려진 은사주의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떤 목사는 신유의 은사가 다음과 같이 역사한다고 했다. “아침 예배 때 주께서 내게 어떤 신유의 기적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씀하신다. 암 환자가 세 명 고침 받을 것이다. 한 명의 요통 환자, 그리고 두 명의 두통 환자도 고쳐질 것이다. 나는 이것을 회중들에게 발표하고는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고 저녁 때 오면 그 밤에 고침 받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신유 은사자와 병고침에 대한 정밀 분석
비록 신유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방법론과 활동들이 비성경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일들이 그들의 집회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입신”으로 쓰러지기도 하고, 고침받았다고 소리치면서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서서 기도하기도 한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신유 은사자들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거가 많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신유 은사자들이 증거라고 인요하는 것들은 검증할 수 없는 것들뿐이다. 그것은 다만 추측하거나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하다.
윌리엄 놀런(William Nolen)은 복음주의자가 아니고 의사였는데 이 사람이 신유 은사자들의 주장을 시험해 보았다. 그는 '신유:기적을 찾는 의사 (Healing:A Doctor in Search of Miracle)'라는 책을 썼다. 그 책에는 은사주의자들의 신유 은사에 관한 부분이 있다. 그는 특히 캐서린 쿨만(Kathryn Kuhlman)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놀런은 어떤 신유 집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묘사하고 있다.
"집회는 끝났다. 겨우 다섯 시인데 마지막 찬송 연주와 함께 집회가 끝났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단상에 올라가 자기가 고침받았다는 것을 간증하기 위해 줄지어 서 있었다. 쿨만은 단상을 떠났고 회중들도 모두 돌아갔다.
쿨만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돌아가기 전에 나는 잠시 동안 환자들이 방치해 둔 휠체어를 바라보았다. 심한 고질병으로 휠체어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휠체어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신장암이 척추와 엉덩이까지 퍼진 사람, 빌린 휠체어를 타고 단상에 와서 청중들에게 고침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내 도움을 받아 객석에 돌아갔던 그 사람도 휠체어에 누워 있었다. 그의 치유는 너무도 짧은 발작적인 것이었다.
나는 통로에 서서 좌절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서, 절뚝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가는 부모들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면서 쿨만이 여기에 있었다면 하고 생각했다. 그녀는 집회 기간 동안 “책임감, 막중한 책임감”에 대해, 즉 치유 받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에 대해 두 번 정도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과연 그녀가 얼마나 자주 그들을 보았는지 의심스럽다. 과연 그녀는 점액낭염과 관절염 때문에, 마른 다리 때문에, 혹은 정박아 자녀 때문에, 간암 때문에 겪는 고통에서 해방된 사람들의 기쁨을 알까?
나는 그녀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 정말 알고 있을까 궁금하다. 나는 그녀가 알고 있으리라고 믿을 수 없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의학적인 치료 과정을 잘 알지 못한다. 먼저 우리 몸 자체의 치유 능력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캐서린 쿨만은 종종 “내가 치료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나를 통해 치료하신다”라고 말한다. 추측건대, 쿨만이 이 말을 반복하는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본다. 첫째, 만약 그 환자에게서 진전의 기미가 없으면 비난 받는 것은 캐서린 쿨만이 아니라 성령이다. 둘째, 그녀는 병고침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다. 그래서 일단 책임 소재를 성령으로 돌려놓음으로써 만약 누군가 그녀의 치유 능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때 쉽게 대답할 수 있게 했다. “난 몰라요. 성령이 모든 일을 할 뿐이죠.”
놀런 박사는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신유 은사자뿐만 아니라 의사들도, 치료를 하지 않고 병증세가 완화되고 있다고 말만 해주는 것으로도 환자를 점점 나아지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치료는 어떤 기적에서 온 것이 아니라 단지 그 환자 자신의 자율적인 신경 작용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놀런은 또 말하기를, 모든 치유자들 즉 신유 은사자들과 일반 의사들이 이런 암시 효과를 어느 정도 이용한다고 설명한다. 놀런은 고백하기를 환자에게 약을 주거나 주사를 놓을 때 종종 그 환자에게 24시간 혹은 48시간 이내에 좋아질 것이라고 말해 준다고 한다. 그러면 그 환자는 그 불확실한 메시지 때문에 상태가 더 좋아진다고 한다. 널런이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면 많은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특히 기능적인 질병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놀런 박사는 기능상의 질병과 기관상의 질병의 중요한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능상의 질병이란 기관은 멀쩡한데 그 기능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하는 경우를 가리킨다. 기관상의 질병은 그 기관 자체가 병들었거나, 상처가 남거나, 물리적으로 손상되었거나 혹은 아예 기관 자체가 죽은 경우를 말한다. 전염병, 심장마비, 담석증, 탈장, 디스크, 각종 암, 골절, 선천적 불구, 열상 따위가 바로 이 기관상의 질병에 해당한다. 놀런은 신유 은사자라고 해도 이러한 기관상의 질병은 치료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어떤 잡지 기사에서 놀런은 쿨만이 정신에 관련된 “신경성 질환”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간단히 말해서 팔이 아픈 것은 기능상의 질병이다. 그러나 팔이 말랐거나 아예 없다면 그것은 기관상의 질병이다. 팔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경성 질환이다. 놀런은 이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치유 기적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살펴보라. 담석증이나 심장병, 암, 혹은 그밖의 다른 심각한 기관상의 질병을 치료했다는 사람들에 대한 자료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확신하건대 위통, 가슴앓이, 호흡 곤란 따위를 앓던 사람들이 잠시 나아진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신유 은사자들과 신자들이 이 일시적인 증세를 그 병이 치료된 증거라고 간증하는 것을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환자가 내려가는 것을 잘 주시해서 보면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 “치유”라는 것은 결국 항상 일시적인 증세의 변화일 뿐이다. 병의 근원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이다.
신유 은사자들이 심각한 기관상의 질병을 치료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따금 환자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불행을 가져오게 한다. 때때로 그들은 환자들의 생명을 건질 수 있게 하는 효과적인 도움까지도 받지 못하게 만든다.
몇 해 전에 지금 이 장에서 이야기한 것들을 설교한 적이 있는데, 설교가 끝난 후 어떤 젊은 남자가 내게 와서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의 설교가 내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아마 모르실 겁니다. 저는 언젠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를 다치고 그 뒤로 심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고는 나는 치유되었으며 내 두통이 없어졌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두통이 다시 있게 되자 나는 마치 내가 하나님의 치유 은혜를 받지 못한 것처럼 죄책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나는 의사에게 가지도 않았었는데 오늘 아침 당신의 설교 덕분에 그 죄책감에서 해방되었고 이제 의사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후 어떤 의사가 그 두통이 기관상의 문제에서 생긴 것임을 알아내고는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많은 증거들은 무엇인가?
분명히 신유 은사자들을 믿는 사람들은 놀런 박사가 엉뚱한 소리를 하고 있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결코 그는 복음주의자도 아니고 또 기적을 빋지 않으려는 사람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연구는 객관적일까? 놀런 박사는 쿨만에게 그녀가 “치료된 것”을 보았다는 암 환자들의 명단을 자기에게 보내게 했다. 여기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다.
나는 그녀가 보내준 명단에 있는 사람 중 8명에게 편지를 썼다. 협조 요청에 응한 사람은 쿨만에게서 전립선 암을 고침받았다는 사람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우에 대해 자세하게 알려줬다. 전립선 암은 호르몬 치료에 잘 듣는다. 만약 그것이 넓게 퍼졌다 하더라도 방사선 치료를 하면 좋은 효과가 있다. 이 사람은 수술도 받고 방사선 치료와 호르몬 치료를 다 받았다. 그리고 그는 캐서린 쿨만에게도 “치료”를 받았다. 그런데 그는 자기가 치료된 것이, 혹은 차도가 있는 것이 쿨만 덕분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어 본 사람은 누구라도 보통 사람이건 의사건 어떤 치료가 그의 생명을 실제로 연장시켰는지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만약 쿨만이 성령께서 자신을 통해 암을 “치료”하신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 사람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그녀는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것이다,
놀런 박사는 계속해서 그녀가 보내준 명단을 보고는 캐서린 쿨만에게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82명에 대해 조사를 했다. 82명 중 23명만이 그의 요청에 응하면서 면접했다. 모든 조사를 마친 후 놀런은 소위 치료라고 하는 것들 중에 단 한가지도 제대로 된 것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캐서린 쿨만은 의학적인 지식이 부족하다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이다. 나는 그녀가 사기꾼이거나 협잡꾼이라고 아니면 의도적으로 부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나는 그녀가 수천 명의 환자들이 자신의 집회에 와서 자신의 사역을 통해 기관상의 질병을 치료 받았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조사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나는 그녀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모질게 말하기는 미안하지만, 문제는 무지함에 있다는 것이다. 쿨만은 신경성 질환과 기관성 질환의 차이를 전혀 모른다. 비록 그녀가 최면술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녀는 최면술과 암시 효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자율신경계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그녀가 이것들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다면, 그녀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감추는 법을 배웠음이 분명하다.
한 가지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 쿨만은 자기가 한 일이 보기보다는 그다지 기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녀의 사역의 효과를 위협하는 것은 그 무엇이라도 감정적으로든 지적으로든 모두 부인하도록 스스로 자신을 타이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최근에 “신기한 란디”(The Amazing Randi)로 잘 알려진 전문 마술가 제임스 란디(James Randi)는 신유 은사자들의 주장을 조사한 책을 썼다. 란디는 1986년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에서 텔레비전 방송 설교가인 피터 팝업(Peter Popoff)의 속임수를 폭로했던 장본인이다(팝업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청중에 대한 “지식의 말씀”을 받는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이야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확했다. 그런데 사실은 그가 감춰진 이어폰을 통해 그의 아내가 알려 준 정보를 말한 것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녀는 집회가 시작되기 전에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적은 쪽지와 안내소에서 받은 기록들을 그에게 읽어주었던 것이다).
란디는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부인했다. 그렇지만 그의 조사는 아주 철저하고 또 정당한 것 같다. 그는 몇 번 신유 은사자들에게 “직접적이고 실증할 수 있는 진짜 신유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요구했다. 그는 “만약 내가 기꺼히 인정할 수 있는 기적적인 치료가 한건이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이 책에서 적어도 한 가지 기적은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그 어떤 신유 은사자도 자연적인 회복이나 심리적인 차도, 혹은 속임수로 설명할 수 없는, 그리고 의학적으로 분명히 규명할 수 있는 치료의 기적을 단 한건도 베풀지 못했다. 란디의 결론이 무엇이었겠는가?
“결국 오늘날 신유 은사라는 것은 항상 그랬듯이 단순히 마술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설교자들이 신유 은사는 마술과 다르다고 열심히 외쳐도, 그 행사들은 마술의 요건과 딱 들어맞는다. 마술의 요소들을 다 갖추었으니 그것은 마술이다.”
물론 신유 은사자들은 자기들의 주장을 모호하게 한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자기들이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 사실을 부인한다. 그들은 “나는 치유할 수 없어요. 성령께서 하시지요”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온갖 흥행술과 허세, 각종 속임수를 동원해 그것을 부인한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치유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면, 왜 그들의 집회에 희망에 부푼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이 모이는가? 또 왜 그들의 집회에서 치료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가?
우리가 들은 그 병고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들 중에 진짜도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부서진 뼈들이 고쳐진 적이 있는가? 신유 은사자가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찢어진 얼굴을, 혹은 깨진 머리를 치유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갈비뼈 절단 수술을 받은 사람이 뼈가 다시 생겨나고, 한때 마비 증세를 일으켰던 사람이 이제는 정상적으로 활동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가? 단지 우리가 본 것은 대부분 상상의 질병과 상상의 치료인 것 같다.
오늘날 자칭 신유 은사자라고 하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기가 행하였다고 주장하는 기적들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들은 대부분 뻔한 속임수를 쓴다. 또 그들이 보여준 소위 치료라는 것들은 매우 의심쩍은 것들이다. 그런데 수천 명의 지성인들이 그들의 집회에 계속 가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병이 들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병은 사람을 미치게 만들며 평소에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극단적인 행동까지도 하게 한다. 명석하고 지적이며 분별력 있는 사람들을 비(非)이성적으로 변하게 한다. 사탄은 이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이렇게 말한다.
“가죽으로 가죽을 바꾸오니 사람이 그 모든 소유물로 자기의 생명을 바꾸올지라” (욥 2:4).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불치의 병이나 기관상의 질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은 사실 그렇게 아픈 것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신경성 질환을 앓거나 약간의 기능상의 문제를 갖고 있을 뿐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서 기적이라고 믿는 것들을 봄으로써 믿음을 강하게 하기 위해 이 집회 저 집회를 돌아다녀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에게 전혀 효과가 없다는 데 있다. 실제로 누구의 믿음도 강해지지 않고, 또 누구의 질병도 치료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낙심한 채 스스로 하나님을 만나는 데 실패했거나 혹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은사주의자들과 비은사주의자들 모두가 병고침에 대해들은 말 때문에 혼란과 죄책감, 그리고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냉담하게 대한다고 느낄 때 그들이 겪은 병의 고통은 더욱 심해진다. 신유 은사자들은 지금도 신유의 은사가 있는데 사람들이 병고침을 얻지 못하는 것은 자기들의 잘못이든지 아니면 하나님 탓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유 은사자들의 뒤끝은 항상 개운치 못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방법으로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치료하시는가? 그렇다고 믿는다. 일부 거짓이 있다고 해서 초자연적인 치유의 기적들을 모두 매도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나는 극적인 기적이나 하나님의 즉각적인 간섭은 매우 드물다고 믿는다.
그런 것들은 결코 신유의 대리자인 양 행동하는 은사주의자들에 의해 좌우되지 않는다. 진정한 병고침은 기도의 결과이며, 그것들은 대부분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차도를 보인다. 이따금 하나님은 의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급작스럽게 병자를 회복시키는 경우도 있다. 때때로 하나님은 의학적인 예측을 뒤집고, 일반적인 경우와는 다르게 병자를 회복시키신다. 그런 병고침은 기도의 응답이며,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에 의한 것이며,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신유의 은사,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 병고치는 사역을 위해 특별히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전형적인 신유 기술들은 사도 시대 이후에는 성경적인 근거가 없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치유하신다. 하나님은 기도의 응답으로, 그리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치유하신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 시대에 있었던 병고침과 오늘날 텔레비전과 라디오를 통해서, 이상한 것들을 우편으로 배달해서, 그리고 대륙을 횡단하는 부흥사들에 의해서 행해지는 병고침과는 큰 차이가 있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 차이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치유하셨는가?
오늘날 사람들이 말하는 시유 은사와 성경의 가르침을 비교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사역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사도적 은사에 대한 기본 틀을 마련해 놓으셨으며 엄청난 치유의 사역을 행하셨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질병도 많았었다. 의술이라는 것은 아주 조잡했고 한계가 있었다. 지금 이 시대 보다는 당시에 치유할 수 없는 병들이 더 많았다. 전염병들이 전체 도시를 휩쓸기도 했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을 증명하시기 위해 병자를 고치셨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식으로 치유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나타난 6가지 중요한 특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말씀이나 안수함으로 치유하셨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실 때, 한 백부장이 예수께 나아와서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ㅝ 하는 자기 하인을 고쳐 달라고 간구했다(6-7절).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에게 직접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셨지만 백부장은 사양하고 예수께서 말씀만 하시면 자기의 하인이 낫겠다고 했다(8절).
예수님께서는 그 백부장의 빋음에 놀라셨는데, 특히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고 로마 군인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예수께서 그 백부장에게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시자 그 하인이 즉시 나았다(13절).
예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하루 종일 무리 중에 병든 사람을 치료하셨다. 성경에는 몇 사람이 치유 받았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수천 명은 될 것이다. 숫자야 어떻든 간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말씀 한마디로 고치셨다. 과장된 몸짓이나 특별한 분위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접촉을 통해 치료하기도 하셨다. 예를 들면 마가복음 5:25-34을 보면 단지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고도 혈루증이 고침받은 한 여인의 이야기가 그 경우이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즉시 치유하셨다.
백부장의 하인은 “그 시에”(마 8:13) 나았다고 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도 “즉시”(막 5:29) (개역성경에는 “이에”나았다.) 예수께서는 문둥병자 열 명을 길을 가는 도중에 즉시 낫게 하셨다(눅 17:14). 또, 다른 문둥병자를 만지셨는데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눅 5:13)고 했다. 베데스다 연못의 불구자는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요 5:9). 나면서부터 소경이었던 사람도 가서 씻으니 즉시 나았다. 물론 이 경우에는 예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그 기적을 두 단계로 행하셨다. 하지만 그 치유는 분명히 즉각적이었다.
사람들은 종종 “나는 치유받았고 앞으로 점점 나아질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결코 “점진적”인 치유를 하지 않으셨다. 만약 예수께서 즉시 치유하시지 않으셨다면 그 기적들은 예수님의 신성을 입증하기에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을 비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치유가 단지 자연적인 경과일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완전히 고치셨다.
누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께서 회당에 나가서 시몬의 집에 들어가셨다. 거기에는 베드로의 장모가 중한 열병으로 누워있었다. 그녀는 다 죽어가고 있었다. 예수께서 그녀에게 다가가서 “열병을 꾸짖으시니” 즉시 그녀는 완쾌되었다(39절). 그녀는 일어나서 그들을 수종들기까지 했다. 회복기가 따로 없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뜨거운 물에 꿀을 조금 타서 마시고 몇 주간 안정을 취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는 증세가 계속되고 있는데도 “미듬으로 병고침 받았다고 외치라”라고 그녀를 독촉하지 않았다. 그녀는 즉시 완쾌되었고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치유는 순식간에 이루어졌으며 또한 완전한 것이었다. 이것이 예수께서 행하신 병고침의 역사이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을 모두 고치셨다.
요즘의 신유 은사자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실망한 채로 휠체어에 실려서 돌아가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께서는 비행기 시간이나 텔레비전 시간표에 쫓겨서 시간 내에 끝내야 하는 신유 집회나 프로그램에서 병을 고치신 것이 아니다. 누가복음 4:40에 보면 “해질 적에 각색 병으로 앓는 자 있는 사람들이 다 병인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라고 했다. 누가복음 9:11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섯째, 예수님께서는 기관상의 질병을 고치셨다.
예수께서는 팔레스타인을 돌아다니시면서 기껏 허리의 통증이나 두근거림, 그 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통증 따위를 고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기관상의 질병임이 분명한 환자들을 고치셨다. 예를 들면 앉은뱅이, 손 마른 사람, 소경, 중풍병자 등인데, 이런 병을 고치셨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기적이다.
여섯째,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셨다.
누가복음 7:11-16을 보면 예수께서 나인성에 계실 때 한 장례 행렬을 만나셨다. 어떤 과부가 자기의 독자를 묻으러 가는 길이었다. 예수께서는 그 행렬을 멈추게 하신 후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게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 죽은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했다. 마가복음 5:22-24, 35-43을 보면 예수께서는 또한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기도 하셨다.
오늘날 신유 은사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장례식장이나 장례 행렬, 혹은 묘지에서 그 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어떤 은사주의자들은 이미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지금도 때때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에 나타난 경우들과는 전혀 다르다. 수술대에서 살아 있다는 신호가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된 사람이 그 한 예이다. 이것은 나흘 동안 무덤에 묻혀 있다가 무덤에서 나온 사람이나(요 11장) 혹은 장례 중에 관에서 나온 사람과는 전혀 다르다(눅 7장). 이것들은 의심할 수 없는 부활의 사건이다. 오늘날 그런 일들을 한다고 하는 은사주의자들의 이야기가 근거도 없이 소문으로 떠돌고 있다. 그들은 우리 주님의 기적을 시시껄렁한 것으로 만드는 죄를 짓고 있다. 왜 텔레비전 방송에서 행한 기적들은 그렇게도 죄다 눈에 띄지 않는 증거가 없는 것들뿐인가?
하지만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예수님의 신유 은사는 진정한 은사였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주장, 즉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시기 위해, 그리고 신성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 은사를 사용하셨다.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당신께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시기 위한 방편이었다. 요한복음은 이 진리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요한은 예수께서 행하신 모든 기사와 이적이 그의 신성을 입증한다고 하였다(요 20:30-31).
사도들은 어떻게 치유하였는가?
앞에서 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병고침의 은사에 대한 기준을 세우셨다. 오늘날 신유 은사자들이 예수님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으로 이 일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로부터 병고침의 은사를 받고 그것을 사용한 사도들과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 은사를 사용했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열두 제자 모두에게 병고침의 은사를 주셨다(눅 9:1-2).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는 이 은사를 70명의 제자들에게도 주어둘씩 보내 복음을 전하고 병자들을 고치게 하였다(눅 10:1-9).
그 외에 신약성경의 어디에 누가 신유 능력을 가졌는가? 그렇다. 바나바(행 15:12), 빌립(8:7), 그리고 스데반(6:8)과 같은 사도들의 동역자 몇 명이 그 은사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 은사가 교회에서 무작위로 시행된 적은 결코 없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에게, 열두제자에게(바울을 포함하여), 70명의 제자에게, 그리고 사도들과 밀접한 동역자들에게만 주어진 은사였다.
사도행전 3장은 신유 은사가 사도들로 하여금 그들의 복음을 선포하는데 있어서 어떤 역할을 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를 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가는데 어떤 앉은뱅이가 구걸을 하였다. 베드로는 그에게 응답하여 말하기를 자기에게는 돈이 없지만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나서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라고 말했다(행 3:6).
그러자 그 사람은 벌떡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삽시간에 소문이 퍼지고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사람이 여러 해 동안 성전 문앞에서 구걸하던 앉은뱅이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드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본 것에 대해 놀라지 말라고 이야기하면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행한 기적은 결코 베드로나 요한 자신들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베드로의 설교가 그 청중들에게 얼마만큼 충격적인 것이었으며 또 그 치유의 기적이 얼마만큼 효과적이었던가를 이해해야만 한다. 베드로는 지금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만약 그저 걸어 다니면서 단순히 그들에게 설교를 했다고 가정해 보자. “볓달 전에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그를 믿으십시오”라고 말이다.
그 메시지가 1세기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고 놀라운 것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기들의 메시아가 일개 잡범들과 똑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유대인들은 대개 그들의 메시아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던 그 미운 로마인들의 속박을 제거하기 위해 권능과 영광 중에 오시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를 고치는 것과 같은 그런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듣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나타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무서워하였다. 사도행전 4:4에 의하면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라고 했다.
오순절 때 교회가 시작되었다. 새 시대가 온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도들로 하여금 그 메시지를 선포할 수 있도록 기적적인 능력을 주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치유 기적에 나타난 여섯 가지 특징이 사도들의 치유 기적에도 똑같이 나타난다.
첫째, 사도들은 말씀이나 안수함으로 치유했다
사도행전 9:32-35에 보면 베드로는 중풍병으로 8년간 누워 있던 애니아라는 사람을 고쳤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오직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애니아가 즉시 나았다(34절).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멜리데라는 섬에서 안수하여 병자를 낫게 하였다. 멜리데의 지도자 중 하나인 보블리오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을 영접하였다. 보블리오의 부친은 심한 열병과 이질로 누워있었다. 바울이 들어가서 기도하고 그에게 안수하여 낫게 하였다(8절).
둘째, 사도들은 즉시 치유했다
성전 문에 있던 앉은뱅이는 즉시 일어나서 뛰고 걷고 하나님을 찬양했다(행 3:2-8). 다른 치료나 안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불구였던 그 남자는 즉시 치료되었다.
셋째, 사도들은 완전히 고쳤다
사도행전 3장의 앉은뱅이의 경우에서 뿐만 아니라 9장 애니아의 치유에서도 이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9:34은 의미 심장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완전하게 하신다.”(개역성경에는 “낫게 하시니”로 되어 있다) 예수님의 치유와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치유는 완전하다. 점점 좋아진다거나, 증세가 재발한다거나, 혹은 조금씩 나아진다는 그런 경우는 없다.
넷째, 사도들은 각 사람을 모두 고칠 수 있었다
사도행전 5:12-16을 보면 사도들은 많은 표적과 기사를 행하였고 사람들은 그들을 칭송했다. 그들은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와 침대와 요 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기까지 했다고 성경은 기록하였다. 그리고 근방의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병든 사람을 데려왔는데 “다 나음을 얻느니라”(행 5:16)고 했다.
사도행전 28:9에 보면 바울이 보블리오의 부친을 낫게 한 후 “섬 가운데 다른 병든 사람들이 와서 고침을 받았다”라고 했다. 어느 누구도 고침받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다섯째, 사도들은 기관상의 질병을 낫게 했다
그들은 기능상의 장애를, 혹은 가벼운 증세나 심리적인 문제로 인한 질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었다. 성전 문 앞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는 40세쯤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나면서부터 불구였다. 보블리오의 부친은 이질, 즉 전염에 의한 기관상의 질병에 거린 사람이었다.
끝으로, 사도들은 죽은 사람을 살렸다
사도행전 9:36-42에 베드로가 도르가를 어떻게 살렸는지에 대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42절을 잘 보면,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역시 우리는 여기에서 기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메시지를 믿게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20:9-12에 보면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서 죽었는데 바울이 그를 다시 살렸다.
오늘날 많은 주장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이와 같은 여섯 가지 특징을 반영하고 있지 않다.
끝으로 한가지만 지적하고자 한다. 성경에 의하면 기적적인 은사를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은사를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신유 은사자들은 결코 수시로 그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럴 수도 없다. 그들은 성경적인 병고침의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 아니고 주님께서 하신다”라고 말함으로써 교묘하게 어려움을 면한다. 그래서 반복되는 실수에 대한 비난은 그 은사자가 아니고 하나님이 받게 된다.
신유 은사는 끝났지만, 주님은 계속해서 치유하신다.
신유 은사는 초대 교회 시대에 복음의 메시지와 권위를 확증하기 위해 사도들의 공동체에 부여하신 기적적인 역사 중 하나였다. 일단 하나님의 말씀이 확증된 이후에 그 표적들은 사라졌다. 기적적인 표적은 더 이상 필요치 않다. 사도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의 정당성을 확신하도록 하기 위한 강한 표적으로 병고침의 기적을 행하였을 뿐이다.
빌립보서 2:25-27에 보면 바울은 그의 좋은 친구 에바브로디도가 여러 해 동안 심한 병을 앓고 있다고 했다. 바울은 전에 병고침의 은사를 발휘한 적이 있다. 왜 그는 에바브로디도의 병을 낫게하지 않았는가? 어쩌면 그 은사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바울은 단지 그 은사를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은사를 남용하려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어쨌든 에바브로디도를 낫게 하는 것은 신유 은사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 은사는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건강하게 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불신자들로 하여금 복음이 하나님의 진리인 것을 믿게 하기 위한 표적일 뿐이다 .
디모데후서 4:20에서도 우리는 유사한 경우를 보게 된다. 거기에서 바울은 드로비모를 병들었으므로 밀레도에 남겨두었다고 했다. 왜 바울은 아픈 그의 친구를 그냥 두었는가? 왜 그를 고치지 않았는가? 그것은 신유 은사의 원래 의도에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딤전 5:23; 고후 12:7).
병고침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사용된 기적적인 표적 은사였다. 그것은 기독교인들이 건강을 유지하도록 하기위해 영원히 주어진 은사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 많은 은사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고 가르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왜 하나님은 애초부터 기독교인들이 병들게 하시는가?
이 세상에서는 신자들도 죄의 영향력 아래 있는데 왜 고통이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모든 기독교인들이 건강하게 잘산다면, 만약 화목의 유익이 완전한 건강이라고 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기 위해 몰려들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그들의 동기는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에게 나아오기를 원하시지, 단지 그들이 하나님을 육체적인 혹은 일시적인 병 치료를 위한 만병통치약으로 알고 하나님께 나오기를 원하시지 않는다.
은사주의자들의 병고침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은사주의자들은 종종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물음에 대하여 체험에 호소하여 응답한다. 그들은 “하지만 믿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라고 변명한다. 나 역시 은사주의자 친구들에게서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듣는다. “이 부인의 아들이 암에 걸렸었는데……”, “내 친구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허리가 굽어서 움직이지도 못했었는데……”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어떤 신유 은사자도 분명히 입증될 수 있도록 기관상의 질병을 즉각 치유한 경우는 없었다. 어떤 신유 은사자도 병고침 받기 위해 온 사람들을 모두 낫게 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올 때나 다름없이 병든 채, 불구인 채 돌아갔다. 어떤 신유 은사자도 죽은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밖에 다른 확증 거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구원의 길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신유 은사자들의 화목과 구원에 관한 신학은 의심스럽다. 은사주의자들과 지도자들은 사람들에게 질병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지 않는 것 같다. 신유 은사자들은 특별한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병고침에 대한 증거라고 제시하는 것은 보잘것없고 미심쩍은 것들이며 과장된 것들이다. 병원에 많은 환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은사주의자들이 병원에 가서 기적을 행한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은사주의자들이 병고침이라고 말하는 사례들은 의심할 바 없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 말고 다른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는 것들이다. 신유 은사자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병들고 죽는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는 많은 혼란과 모순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한 가지 되물어보고 싶다. 이런 일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분명히 성경적인 병고침의 은사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병고침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성경적인 병고침의 은사는 사라졌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를, 하나님이 원하실 때 치료하신다. 어떤 때는 나의 인간적인 생각으로 치유되었으면 하고 바랄 때 치유하시는 경우도 종종 있다. 여느 목사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설명할 수도 없고 도대체 어떻게 손 쓸 도리도 없이 신실한 기독교인이 고통을 받는 아주 비극적인 경우들을 많이 보아 왔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회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는 가족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했지만 전혀 응답이 없는 경우도 있었다. 은사주의 목사들도, 만약 그들이 정직하기만 하다면 자기들도 역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러나 은사주의를 가르치는 자들과 치유자들, 그리고 그 지도자들이 병고침을 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하는 이야기는 항상 “그들이 믿음이 없어서 치유 받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그런 변명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
왜 기독교인들이 병드는가?
우리는 필연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왜 기독교인들이 병드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어떤 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출애굽기 4:11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매우 단순하면서도 직접적으로 언급된 이 말은 매우 충격적인 것처럼 들린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누군가 고통받기를 원하신다는 말인가? 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벙어리나 귀머거리, 혹은 소경이 되게 하시는가? 그러나 성경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계획은 우리의 제한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하나님은 불구자와 허약한자들을 만드셨다. 결함을 가진 아이들이 매일 출생한다. 많은 아이들이 선천적인 불구자로 자란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병을 앓기도 한다. 우리의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이다.
둘째, 어떤 병은 사탄에게서 온다.
누가복음 13:11-13에 보면 예수께서 “십팔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있다. 예수께서 그 여자를 보시고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뜻이 있어서 사탄으로 하여금 사람을 병들게 허락하신다. 그 전형적인 성경 사례가 욥이다(욥기 1자을 참조하라).
셋째, 어떤 병은 죄를 벌하기 위한 것이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리암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문둥병에 걸렸는데 회개하고 나았다. 신명기 28:20-22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범죄하면 전염병으로 치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열왕기하 5장에서 엘리사의 종 게하시는 탐욕 때문에 문둥병에 걸렸다.
시편 기자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썼다(시 119:67).
사람이 아프면 혹시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는지 모든 생활을 점검해야 한다. 만약 고백하지 않은 죄가 있거든 즉시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하심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다른 병든 사람을 상담할 때는 주의해야 한다. 조심성 없이 신실한 자기 반성없이 다른 사람의 죄를 꼬치꼬치 캐묻거나 정죄해서는 안 된다. 이런 성경의 원리를 남용하면 다른 사람을 잘못 정죄하기 십상이다.
어떤 경우에는 죄 때문에 아픈 삶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벌하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병들어 있다고 해서 그것을 꼭 그 사람의 죄와 관련시키는 것은 마치 사람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병고침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잔인하고 무자비한 처사이다. 우리는 욥의 친구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욥 42:7-8).
하나님께서는 믿음만 있으면 누구든지 고침을 받을 수 있다고 약속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자들이 건강하기를 원하신다는 은사주의자들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현재도 치유하신다고 약속하셨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하나님께서 모든 병을 치료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신자들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음을 얻기 위해 기도할 수는 있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품 때문에 치유하신다.
출애굽기 15:26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여호와에 해당하는 단여 야훼 로페카(Yahweh Ropeca)를 직역하면 “너희의 치료자 여호와”이다. 따라서 성도들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 간구할 권리가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 때문에 치유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이름 안에서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이루어지리라고 약속하셨다(마 21:22; 요 14:13-14; 16:24; 요일 5:14). 이것은 우리의 요구가 반드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우리가 병고침을 위해 기도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고치신다.
셋째, 치유는 하나님의 전형적인 표본이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의 표본을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인간의 고통과 질병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알고자 한다면 예수님을 보면 된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시기 위하여 어디든지 가셨다. 다른 방법으로도 자기가 곧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입증하실 수도 있었을텐데, 예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함을 이루려 하시기 위해”(마 8:17) 고통과 괴로움을 면하게 하는 자비의 길을 택하셨다.
그렇지만 베드로전서 2:24에 관한 논의에서 지적했듯이(은사Ⅰ. 4장 참조), 이것이 이 시대의 모든 병을 치료하는 것이 속죄 사역의 일부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것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확증하는 데 있어서 치유를 본보기로 한 것이며, 이것은 또한 우리가 장차 이 세상의 질병과 불구로부터 영원히, 완전하게 해방될 것을 보증하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집에는 질병이나 죽음이 없다.
기독교인들도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치료하신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기독교인들이 의사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증거한다. 이사야 38장은 히스기야 왕이 죽을 병에 걸렸을 때 어떻게 했는가를 기록하고 있다. 왕은 슬피 울면서 낫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간구를 들어주기로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가 낫게 되었는가? “이사야는 이르기를 한 뭉치 무화과를 취하여 종처에 붙이면 왕이 나으리라”(사 38:21)고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치료하기로 하셨다면 왜 찜질이 필요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한 가지 원리를 제공하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프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즉 낫기를 위해 기도하고 의사의 치료를 받는 것이다.
마태복음 9:21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견해를 보이셨다. 예수님께서는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라고 하셨다. 예수께서 지금 죄의 문제를 말씀하시고 있기는 하지만, 그는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하셨다.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의사의 치료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됨을 확실하게 하셨다.
사도행전 28장에 보면 바울이 보블리오의 부친을 기적같이 고쳤더니 많은 사람이 병 낫기를 바라고 그에게 왔다. 9절에서 다른 병든 사람들이 ‘고침’에 해당하는 단어는 의학 전문 용어이지만, 8절에서 바울이 보블리오의 부친을 낫게 하는 데 사용된 헬라어는 치료에 대해 일반적으로 쓰이는 용어이다. therapeutic이란 단어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어쩌면 바울이 기적적으로 낫게 한 후 그의 동역자 누가는 의사였으므로(골 4:14) 의학적으로 치료했을 것이다. 얼마나 멋진 협력 선교인가?
원리는 분명하다. 아플 때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또 훌륭한 의사의 도움도 받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신뢰해야 한다. 결국 고난은 우리에게 현재에는 유익을 이루고(약 1:2-4; 밷전 5:10), 장래에는 영광이 되게 한다(롬 8:18. 벧전 1:6-7).
우리는 모두 타락으로 말미암아 언젠가는 죽게 될 존재(살아서 그리스도의 재림을 맞게 될 선택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모든 성도들은 자신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기를 소망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병들었을 때에도 성도들은 성경적인 인식을 벗어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돌리기를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정하신 방법으로 그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그의 주권적인 의지와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치료하신다. 그 밖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출처: 은사론 / 존 맥아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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