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20, 2018

목사는 누구인가?

💠목사는 누구인가?

(유진 피터슨 목사 인터뷰)

유진 피터슨 이름 앞에는 시인, 교수, 성경번역가, 영성지도자, 베스트셀러 작가 등 여러 수식어가 붙는다. 그래서 그가 원래 목사라는 사실을 깜박 잊을 때가 있다. 피터슨은 최근 펴낸 회고록 '유진 피터슨' (IVP 역간)에서 몬태나주 호숫가 오두막집에서 보낸 유년시절부터 목사가 되기까지의 우여곡절, 이후 사역을 하나하나 들려준다. 중요한 전환점마다 이야기를 멈추고 목사가 되어가는 자신에게 그 시기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자세히 나눈다. 이 책과 그의 소명, 목사의 역할을 놓고 피터슨과 마주했다.

📍회고록을 쓰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실 회고록을 쓸 생각은 없었습니다. 어떻게 쓰는지도 몰랐고요. 하지만 회고록을 진지하게 고려해볼 만큼 많은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습니다. 글을 쓸 때는 늘 작업할 텍스트가 있었는데, 이번에는 제 인생이 그 텍스트였고, 그것이 제게는 생소했습니다. 그래서 6개월간 이것저것 썼다가 버리기를 반복했지요. 도대체 감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릴 때 아버지의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억이 떠올랐는데, 그게 다 목사라는 제 소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거든요. 그 일이 떠오른 것은 일종의 계시와도 같았습니다. 그리고 교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던 뉴욕에서의 생활, 훗날 '메시지'를 집필했던 일 등이 있었지요. 이 모든 일이 제 여정에 한몫을 했습니다.

📍소명은 한순간에 다가옵니까, 아니면 평생에 걸쳐 발전합니까?

제 경우는 발전했습니다. 내가 되고자 하는 것이 ‘목사’임을 알았을 때가 스물다섯 살 때였어요. 하지만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이른 나이에 목사로 부름받았다고 느낍니다. 중년에 자신의 소명을 발견하는 사람도 있고요. 그러니까 아주 명쾌한 문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가족, 교육, 환경 등 우리 인생의 여러 요소를 부르심의 도구로 사용하신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부르심은 목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무것도 낭비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늘 교수가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처음 교회에서 일했던 1-2년 동안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진리를 말해주면서 교수처럼 행동했지요. 하지만 목사는 그런 사람이 아님을 결국 깨달았습니다. 교회는 강의실처럼 정해진 주제가 있고 흑백이 분명하고 진실과 거짓이 명확한 곳이 아닙니다. 누구나 모호하고 복잡한 인생을 삽니다. 제 임무는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서 적절한 언어를 찾고,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그 모호함을 내던져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목사님의 본질적 역할은 무엇입니까?

목사로서 제 임무는 성경이 어떻게 실천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진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신학자와 변증가들의 몫이고요, 저는 그냥 성경이 진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서는 별로 고민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성경이 말하는 대로 사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사실을 회중에게 보여주는 증인이 되어야 했고, 거대 진리나 교리를 추상화해서 말하는 것은 피해야 했습니다. 저는 직장과 가정과 지역사회에서 성경 속 생각들을 실제 삶으로 살아낼 방법을 알고 싶었습니다.

목사의 역할은 복음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구현이라는 것은 추상적으로는 할 수 없고 각 개인을 상대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중의 규모가 작아야 했고, 이는 매우 중요했습니다.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제가 설교하고 가르치고 함께 기도하는 사람들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자신도 복음대로 살려 하고 회중도 복음대로 살게 하려는 목사의 권위는 어디에서 나올까요?

분명히 수직적인 상명하복식 권위는 아닙니다. 목사의 권위는 공동체의 온전한 일원이 되어 말씀이 실제로 살아낼 수 있는 것임을 증거하는 데서 나옵니다. 그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그냥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살고 겉과 속이 다르지 않은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것이지요. 사람들에게 무엇을 믿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물론 그것도 포함되기는 하지만, 그들과 함께 그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하는 일을 같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목사의 고유한 임무입니다.

우리는 권위를 사용하는 방식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리가 대단히 유력한 자리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잘 모르면서 우러러보고 신뢰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은 공동체 안에서 발전합니다. 목사인 우리가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권위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자신의 성도들과 함께 있고 싶어 하지 않을 때 적신호가 켜집니다. 미국에는 심방을 전혀 하지 않는 목사들이 많습니다. “그런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장로들이나 집사들이 할 일이다”라고 말하지요.

그것은 참으로 강력한 신호입니다. 만약에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다면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고 환자들이나 임종을 앞둔 사람들에게 심방을 가지 않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그런 목사들은 역할과 책임의 관점에서 생각을 합니다. 그들이 교회 일을 하는지는 몰라도 목사는 아닙니다. 목사는 관계를 위해 시간을 내야 합니다.

📍목사는 양떼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양떼를 안내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긴다고 누가 말했습니다. 이 말에 동의하시는지요?

저라면 말을 조금 바꾸겠습니다. 목사가 ‘나는 하나님의 대변인이고 너희들은 나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입장을 갖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목자는 오직 한 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명령하고 명령받는 식이 아니라 공동체로서 이 일을 하는 겁니다. 우리가 권위를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그것을 말하는 방식은 사려 깊고 정확해야 합니다.

📍목회를 시작하신 이후로 목사의 권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어떻게 변해왔습니까?

참으로 충격적인 변화 중 하나는 목사가 탈인격화되어서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사람 혹은 비전을 던져주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역할로 축소되었지요. 회중이 자기 목사를 잘 모르면 그를 단상에 올려놓고 탈인격화하기 쉽습니다. 또한 자기 성도들을 잘 모르는 목사는 성도들을 그저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과 그러지 않는 사람, 십일조를 내는 사람과 내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비인격적 명칭들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대하는 대신 사회적 혹은 심리학적 범주로 대하게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아주 좋지 않은 일 중 하나는 MBTI 검사를 도입해서 사람을 이해하려 드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을 듣고 그들을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냥 검사하고 그룹별로 모은 후 성격유형을 보여주는 작은 표를 달고 다니게 합니다.

이것이 목사에게 위험한 이유는 사람을 파악하고 다룰 수 있는 범주를 손에 쥐면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을 멈추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쓰는 용어 중 제가 없애고 싶은 단어가 ‘결함 있는(dysfunctional)'입니다. 정말 추한 말이에요. 자전거는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용어들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사람을 문제로 생각하도록 자신의 상상력을 훈련하게 됩니다. 사람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탐험해야 할 신비입니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 해결사가 아닙니다. 목사는 치료사가 아니지요. 목사의 일은 관계, 용서, 은혜, 치유, 이해, 구속, 인내와 훨씬 더 많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계발해야 하는 덕목들입니다.

📍목사도 자기 성도들에 대해 목표가 있어야 할까요? 이를테면, 그리스도를 알게 한다든지, 믿음을 실천하게 한다든지, 신앙 안에서 자라게 하고 그것을 나누게 한다든지 하는 목표 말입니다.

예. 다 좋은 목표들입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제시하는 방법에는 신중해야 합니다. 사람들을 분류해서 누가 인사이더이고 아웃사이더인지를 알아보려고 추상적으로 제시하는 목표는 아닌지 따져보아야 합니다. 인생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합니다.

물론 저도 목표가 있습니다. 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지금 어떻게 일하시는지 알아볼 만큼 충분히 오래 기다리며 듣고 보고 할 자세가 되어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우리 성도들 가운데는 20년이 지나도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채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직은 받아들이지 않았구나 하고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받아들인 이들도 상당합니다. 목표 설정은 우리의 상상력을 파괴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목표에 너무 집중하게 되니까요. 

LJ Interview with Eugene Peterson, “Pastors in the present Tense” 
Leadership Journal 2011 여름
유진 피터슨 대담 Leadership Journal

<저작권자 © 크리스채너티 투데이 한국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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