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December 29, 2018

히브리서 개관

히브리서 개관

1.명칭

본 서신의 명칭은 한마디로 애매하다. 초기 전승은 본 서신의 명칭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거나 언급하는 경우 '히브리인들에게'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주후 2세기경 활동한 판테누스와 터툴리안 역시 본 서의 저자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본 서의 표제만은 '히브리인들에게'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명칭이 어떻게 해서 생겼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2세기에 이 문서가 바울 서간집에 포함되었을 때 편집자가 '로마인들에게'와 같은 말에서 유추하여 이 명칭을 붙인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명칭은 단순히 수신자가 유대인들 또는 좀더 정확하게 말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라는 편집자의 막연한 느낌을 반영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명칭에 관한 불확실성은 본 서신의 역사적 배경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불리한 점이 되어 왔다. 물론 서신의 내용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을 찾아내어 추론할 수도 있지만 본 서신에서 역사적인 언급들은 매우 애매하고 단편적이다. 따라서 본 서신의 명칭에 관한한 누구도 확정적인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

2. 수신자

만일 '히브리인에게'란 명칭이 원래의 명칭이 아니라 편의상 편집자가 본 서신에 갖다 붙인 이름이라면 수신자를 밝히는데 있어서 명칭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이 문제는 가능한한 성경 본문의 내증에 근거하여 밝혀져야만 한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본 서의 수신자들은 예수님을 직접 보거나 그의 말씀을 듣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을 받아 예수님을 알고 있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의 집단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개종한 이래 계속 박해를 받았는데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들의 생활이 시작된 직후 심한 박해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에서 아주 떠날 위험에 대해 경고함으로써 계속 신앙의 전진을 하도록 격려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헬레니스트였음을 본 서신에서 추론할 수 있다. 그들은 헬라어로 된 구약성경을 알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옛 제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지식은 구약성경을 읽은 데서 얻은 것이지 예루살렘의 성전 예배를 직접 접한 데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암시되어 있다.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계속되는 박해의 위협 속에서 유대교로 회귀하려는 강한 유혹에 처한 헬라어에 익숙해 있던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보여진다.

3. 저자

1) 바울 저자설

본 서신이 누구에게 보내졌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또한 누가 이 서신을 보냈는지도 알 수 없다. 바울이 저자라는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유세비우스 등의 신념은 동방 기독교의 판단에 영향을 주었고 궁극적으로는 4세기 말엽에 서방 교회의 판단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에서도 본 서신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은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의 경우처럼 단정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본 서신에 나타난 문체와 사상의 양식은 바울의 것과 같지 않다. 즉 본 서신은 구약성경의 헬라어 역인 70인역에서만 구약성경을 인용했으며 바울의 문체보다 훨씬 유창한 헬라어를 구사하고 있다. 특히 바울 서신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독특한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은 바울의 저자설을 부인하기에 충분하다.

2) 바나바 저자설

주후 220년에 글을 쓴 터툴리안은 히브리서의 저자로 바울의 동료이며 사도인 바나바를 지적한다. 이 견해는 아프리카 지역의 교회들의 일반적인 견해로 보여진다. 바나바는 초대교회의 유력한 인물로서 '권위자'(행4:36)라고 불렀으며 헬라 사상에 젖어 있던 구브로 출신의 레위인이었다. 이런 점에서 제사 제도를 구속사에 정확하게 적용하여 기술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했으므로 히2:3의 내용과 부합된다. 그러나 이것은 터툴리안이 지나치게 반유대주의저인 편에 있는 가짜 바나바의 편지와 성경의 사용법이 유사한 것을 보았을 뿐 초대교회 당시의 외적 증거를 확보하고 있지 못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다.

3) 기타 저자설

419년 칼타고 회의 때 가서야 비로소 본 서에 대한 바울의 저작설이 동방에서처럼 사방에서도 전통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나 비평적 판단을 하는 주석가들은 여전히 본 서의 저자가 로마의 클레멘트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누가를 본 서의 번역자 또는 편집자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시대에 칼빈은 누가나 로마의 클레멘트를, 루터는 아볼로 저작설을 주장하였다. 한편 하르낙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함께 본 서를 썼다고 주장했다. 분명한 것은 저자는 제2세대 그리스도인으로서70인역에 정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풍부한 어휘력을 가졌으며 바울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수사학적인 문체의 대가였다. 그는 성경에 능한 자로서 스데반과 빌립의 동료들이며 이방 선교의 선구자들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을 이어받은 한 헬레니스트였다. 그러나 실제로 누가 본서를 썼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만이 그 진상을 아실 뿐이다.

4. 기록연대

본 서의 기록 연대에 관하여 성전이 아직 기능을 하고 있었던 시대로 보는 견해가 전통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성전 파괴 이후로 연대를 계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크게 본 서신의 기록연대는 조기 기록설(A.D.58-60년)과 예루살렘 멸망 직전설(A.D.70년이전)과 그 이후의 설(A.D.80-90년)로 각각 나누어진다. 이와 같은 본 서신의 기록 연대는 로마의 클레멘트 히브리서 인용, 성전 제사의 진행여부, 박해 시기, 신학적 발전 여부에 따른 내, 외증에 의해 결정한다.

5. 목적

그 당시 독자들은 예전에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현재 계속되는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와 죄의 문제로 딜레마에 빠져 유대교로 회귀함을 통해 제사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들은 세례 이후 죄의 문제로 시달리면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는가에 대한 신학적 의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히브리서 독자들의 특별한 상황에 비추어서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하는 그들에게 예수를 믿는 것이 계속 우리에게 도움이 됨을 논증하기 위해 히브리서의 '대제사장 기독론'을 전개한다. 여기서 저자는 예수께서 현재 대제사장 되심과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계속적으로 주고 계심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종말론적으로 한 번 영원히 효과 있는 제사로써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의 죄도 해결해 줄 수 있는 제사라는 것을 보여 주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자는 좀 새로운 논제로 이 문제의 해결을 전개한다.

✔️천사보다 뛰어난 그리스도(1장-2장)

그 어떠한 피조물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모든 것의 우위에 계시다. 그는 천사보다 뛰어나시며 모세나 그 어떤 선지자보다 앞서시는 분이시다. 바로 그러한 분이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의 형제가 되시며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계신다. 본문을 통해 기자는 독자들이 처한 위험 앞에서 구약을 완성하신 대제사장 메시야인 예수를 바라봄을 통해 배교의 위험을 경고하고 있다.

1. 선재하신 뛰어난 메시야(히1장)

본문은 예수그리스도의 선재성과 천사보다 우월함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구약성경의 성취자로서의 예수를 부각시키고 있다. 왜 예수그리스도의 선재성을 강조해야만 했으며 천사보다 뛰어남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구약성경의 성취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독자들의 배교 방지

본 서는 크게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교리부(히1:1-10:18)와 성도의 믿음을 촉구하는 시행부(히10:19-13:25)로 나눌 수 있다. 이중에서도 그리스도의 신적 속성을 강조하는 히1:1-4:14은 비교적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우월성을 집중적으로 논증하고 있다. 저자가 이처럼 예수의 우월성을 여러 관점에서 논증하고자 애쓰는 것은 유대교에서 개종한 성도들의 배교 방지를 위해 먼저 유대인들이 존귀히 여기던 구약적 존재들보다 예수께서 우월하심을 증명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하여 저자는 선지자(히1:1), 천사(히1:4-2:18), 모세(히3:1-6) 등과 그리스도를 비교하면서 예수만이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들에게 온전히 보여 주며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2) 상황화의 가능성

성경은 단순히 문자적 이해에 그쳐서는 시대의 문제에 적절한 해답을 줄 수 없다. 즉 말씀은 그 시대의 맞는 적절한 해석이 요구된다는 점에서 히브리서는 상황화의 가능성에 대한 많은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2. 첫 번째 경고(히2:1-4)

본 서신은 5차례의 경고가 주어진다(히2:1-4히3:7 히4:13 히5:11 히6:20 히10:19-39히12:25-29). 이러한 경고는 본 서신의 기록 목적을 살펴보면 그 이유가 분명해진다. 기자는 점점 더 심각한 경고를 통해 독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주어진 경고는 무엇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기자는 경고를 하고 있는가?

1) 경고

본 서신에 기록된 다섯 부류의 경고는 독자들의 영적 침체와 배교를 염두에 두고 저자가 최후의 진지를 사수하려는 비장한 마음으로 진리의 말씀에 입각하여 신앙의 경고와 권면을 주고 있다. 이중에서 본 장에 기록되어 있는 권고는 복음을 받은 개종한 독자들이 그 말씀을 등한히 여기고 교회 지도자의 교훈을 불순종할 때 초래되는 신앙적 표류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히1:1-3이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를 언급하고 있다면 본문은 계시의 완성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강조하고 있다. 독자들은 구약 시대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 율법과 제사 제도를 고집함으로써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숭고한 말씀인 복음을 저버릴 치명적인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리의 말씀을 주의하여 간절히 삼가지 않는 성도는 뒤로 떨어져 떠내려 갈 수밖에 없으며 이교적이며 세상적인 습성에 물들어 위험한 급류 속에 휘말려 들어가 지극히 고귀한 것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는 과거 천사를 통해 주어진 율법을 어겼을 때 징계를 받았던 것처럼 준엄한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임(히2:2,3)을 권면한다.

2) 등한히 여기는 자의 결과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 있게 공언하는 사람들이 이처럼 구원을 등한히 여긴다면 그들은 구원을 잃어버리게 될 것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즉 영혼의 파멸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은 바로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하는'바로 그 점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3. 고난받는 대제사장(히2:5-18)

본문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사역을 증거하고 있으며 복음을 무시하고 슬그머니 신앙의 대열에서 빠져나가는 독자들의 잘못된 태도에 대해 쐐기를 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독자들에 대한 저자의 경고(히2:1-4)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필요성은 무엇인가?고난을 통해 형제되신 그리스도의 진정한 구원론적 필연성은 무엇인가?

1) 고난의 필요성

하나님의 도덕적 성품으로 본다면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 예수께서 죽음을 당하실 필요는 없었다. 속죄의 필요성은 하나님 자신의 온전하심과 그 성품에 의해서 요구되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그냥 지나칠 수 없으셨다. 인간은 형벌받아야 했고 그의 거룩하심은 타락한 죄인들과의 사귐에서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으나 그의 자비는 우리의 구원을 열망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고난은 자신의 성품과 일치되게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속성을 영광스럽게 나타내 보이시고 그 속성들을 아름답고 조화롭게 제시하며(시85:10,11), 그것들은 새로운 빛으로 감싸서 우주를 찬양케 하는 방편이었다.하나님의 아들이요, 천사들의 왕(히1장)이신 예수께서 또한 중보자로서 인간의 형제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형제됨을 강조하기 위해 먼저 추상적으로(히2:11)설명했고 이어서 구약성경으로부터 인용(히2:12,13)한다. 형제됨의 목적은 죄와 사단으로부터 끌어내어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히2:16),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려 하심'(히2:17)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유명한 명칭인 '대제사장'이 처음으로 나타나는데 이 명칭은 본 서신의 중심 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신약의 어느 책에서도 그에게 부여하지 않는 독특한 신학적 용어로써 예수께서 이루신 구속사역 속에 구약 시대의 소고지 행위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2) 형제 되신 그리스도

그리스도의 형제되심을 부인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만약 우리가 스스로 그리스도의 형제라고 주장한다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함은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가 근심할 때에 하나님, 곧 그리스도가 형제의 사랑으로 우리를 품으신다는 것을 알면 놀라운 위로고 된다. 그것은 천사보다 그 어떤 선지자보다 우월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고난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형제이시다. 그는 인생의 모든 고통을 체험하신 형제이시다. 또한 모든 속죄를 다 이루신 완전한 대제사장이시다. 따라서 예수를 떠나는 일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형제가 되신 예수께서 지금 하나님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는 이 사실을 깨달을 때 감격적인 신앙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선지자보다 뛰어난 그리스도(3:1-4:13)

예수는 모세나 그 어떤 선지자보다 뛰어난 분이시며 집 지은 자요 또 집 맡은 아들이시다(히3:3). 단지 권속으로 그리고 종으로서 하나님께 충성한 모세와 비교될 수 없는 분이시다. 본 연구를 통해 모세보다 뛰어난 그리스도를 살펴본다. 그리고 두 번째 엄중한 경고를 통해 우리를 멸망시키고 불신앙의 결과를 강조함으로 예수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시작할 때에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 됨'(히3:14)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그리스도의 우월성(히3:1-4)

본문에서 저자는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형제들에게 사도요,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면 모세보다 우월하신 그리스도를 논증하는 본문으로 변증적이요, 목회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모세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인가? 또 어떤 면에서 모세보다 뛰어난 영광을 소유하고 계시는가?

1) 모세는 하나님의 집에 충성한 권속

모세는 이스라엘이 지도자였으나 하나님의 집에 충성한 권속에 불과하다. 그러나 예수는 그 집을 지으신 자로 충성했으므로 모세보다 더 영광스러운 직분을 가진다(히3:3). 독자들은 모세의 이름과 명성에 대해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 기독교인들에게 기자는 율법 수여자의 높은 존귀함과 훌륭한 섬김의 직분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계속해서 예수는 그보다도 더욱 존귀함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모세는 그 인격이나 업적에서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는 사람이었다. 유대인들은 그를 자신의 해방자요, 지도자요, 율법 수여자요, 선지자요, 하나님 앞에서의 대변자로서 거의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모세와 같은 선지자'(신18:15)라고 했다. 그리스도는 신약의 모세이시다. 두 사람은 율법은 모세로 은혜와 진리는 예수를 통해 수여된 새 체제를 가져온 분이다.

2) 모세보다 뛰어난 영광을 가진 예수

그러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시며(빌2:6), 영광과 빛의 근원이시기 때문에(요1:4,5,9) 그분과 비교될 만한 영광스런 존재는 없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피로 하나님의 집을 세우셨으므로 그 집에 속한 자에 불과한 모세보다 더 존귀하신 분으로 언급된다(히3:3).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살리는 의의 직분을 가졌기 때문에 정죄의 직분을 가진 모세보다 영광스럽다고 증거하고 있다(고후3:9,10). 모세와 그리스도는 엄청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두 분 모두 하나님께서 부여한 사명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았다.

2. 충성의 두 모델(히3:5,6)

본문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모세보다 더 존귀하다고 하면서 그 이유로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한 것에 비해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저자는 모세의 직분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가? 또한 예수의 직분은 무엇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하나님의 집이 되는 조건은 무엇인가?

1) 사환과 아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했다. 이 말은 모세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장차 도래할 예수와 그 복음을 소개하는 자로서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계시를 전달하는 임무를 띤 사환이었다. 모세가 비록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집에서 종으로 충성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하였다. 종과 아들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저자는 모세와 예수께서 충성하였다는 점에서는 유사할지 모르나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암시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탁월한 존재이긴 하였으나 본질적으로 일반 사람들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집을 맡은 자이며 아들로서 질적인 우월성을 갖는다.

2) 하나님의 집

여기서 하나님의 집은 구약 시대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신약 시대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며 '그의 집'이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서 복음 안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을 성취하시리라는 확신과 자랑스러움을 인내속에서 견고하게 붙잡고 나아가야 함을 상기시키고 있다.

3. 두 번째 경고(히3:7-4:13)

저자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서신의 첫머리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히1:1)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수반되는 불신앙의 위험에 대한 실예 혹은 상징으로서 광야 생활중에 일어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사건을 인용하고 있다. 본문의 엄중한 경고는 무엇인가? 배교의 무서운 위험과 그 대비책은 어떤 것인가? 또한 배교의 결과는 무엇인가?

1) 엄중한 경고

본 서신의 독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에 속했던 유대교로 다시 돌아서거나 배교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 유대인 성도들은 광야 생활에서 결정적인 실수를 범한 이스라엘 열조들이 비극적인 결과를 기억해야만 했다. 그들이 그리스도께 대하여 불순종한다면 그들 역시 과거 불순종했던 이스라엘 열조들의 불행한 전철을 밟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이스라엘 열조들의 불신앙은 '마음을 강퍅하게 하다'(히3:8,15), '마음이 미혹되다'(히3:10)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굳어버린 마음은 하나님을 대적하기 때문에 결국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 멸망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자는 성도들의 배교의 위험을 엄중히 경고하면서 그 대비책으로 '피차 권면'(히3:12)하라고 말한다. 또한 이 대비책은 '매일 또는 날마다' 실행하여야 하며,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히3:13), 즉 현재의 삶이 계속되는 동안에만 행할 수 있음을 말한다.

2) 무서운 결과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 아니며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의 어떤 결함 때문이 아니다. 성경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히3:19)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의 불신앙으로 인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처럼 불신앙은 우리를 참된 영혼의 안식으로부터 몰아낸다.

본 연구를 통해 배교의 위험 속에 있는 독자들의 실존적 어려움을 강한 어조로 진리를 고수할 것을 간곡히 권고하는 기자를 만나게 되다. 끝까지 견디며 견고히 진리를 지키는 자만이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길가에 뿌리운 씨앗이나 돌밭에 뿌려진 씨앗의 공통점이 결실치 못함에 있음을 보여 주셨다(마13:19-22).

✔️제사장보다 뛰어난 그리스도(4:14-7:28)

히브리서는 예수의 십자가 속죄 사역을 대제사장의 속죄 사역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기자는 예수의 제사장직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직으로서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성을 가진 제사임을 강조함으로써 구약의 제사와 비교되지 않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1. 대제사장 그리스도(히4:14-5:10)

본문은 안팎의 곤경으로 인해 영적 침체 상태에 빠진 독자들(히10:32-34)을 염두에 두고 있다. 예수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종의 형체를 가져 우리와 같이 되셨고(빌2:6), 인간의 연약과 시험당함을 체험하셨다(히14:15). 그렇다면 예수와 대제사장의 유사점은 무엇인가? 또한 대제사장보다 우월한 것은 무엇이며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의 비유를 통해 기자가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1) 대제사장 예수

구약의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자기 백성들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과 화목케 하는 중보적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사역을 수행하는 대제사장은 1년에 한 번씩 모든 백성을 대표해 제사를 드렸다. 예수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십자가 위에서 제물이 되어 온 인류에 대한 대속 사역을 감당하셨다. 그러나 예수의 대제사장직은 구약의 대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구약의 제사장이 1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 자기와 모든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는 제사를 드렸으나, 예수는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자기 몸을 드려 영원한 제사를 드렸다(히7:27). 또한 예수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죄 있는 인간들이 겪어야 할 모든 연약을 체휼하시고 인간들과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후에 영원한 하늘나라의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제사를 드렸다(히9:11-14).

2) 멜기세덱 반차의 대제사장

멜기세덱은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자로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었다(히7:3). 예수 역시 그의 제사장 직무는 영원히 계속된다.

예수의 대속 사역의 효과는 그의 보혈을 의지하는 자에게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에도 동일하게 영원히 계속되고 있다. 이처럼 예수의 사역효과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유대교의 제사제도를 통해 현재의 죄를 사함받고자 하는 독자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2. 세 번째 경고(히5:11-6:20)

기자는 독자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몇 마디의 실질적인 훈계를 하고 있으나 독자들의 마음이 둔하기 때문에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했는가? 독자들의 종교적 지식이 그처럼 결핍된 이유는 무엇인가? 또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수신자들의 영적 상태

수신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된지 오래지만 멜기세덱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듣지 못할 만큼 둔한 자들이었다(히5:11).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 말씀의 초보'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다름 사람의 가르침을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먹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히5:12). 이들은 자신들의 게으름과 우둔함으로 말씀을 삶속에 적용시키지 못하며 말씀의 여러 가지 은혜와 축복을 체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다(히5:13). 또한 이들은 지각을 사용,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여 있었다(히5:14). 이처럼 본 서신의 수신자들은 오랜 신앙의 연륜에 걸맞는 신앙 성장을 이루지 못한 자들이었기 때문에 기자는 그들의 신앙을 책망하여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갈 것을 권면하고 있다.

2) 신앙의 결핍

수신자들이 '듣는 데 둔했던' 원인은 그들의 마음이 기독교와 유대교사이에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이며, 많은 시련을 겪게 하는 믿음을 저버리게 하려는 많은 시험이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우리의 시험 역시 실제적으로 비슷하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고 시도하기 예사이며 대단히 심각한 희생을 요구하는 종교적 충성이 익숙해지기를 피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이러한 근본적 이유들에 덧붙여서 진지한 성경연구의 결여, 훈계에 대한 부모의 소홀, 불규칙적 교회 출석, 비교훈적·비성경적 설교, 영성을 위한 훈련의 부족 등을 들 수 있다.

3. 멜기세덱과 그리스도(히7장)

본문에서 저자는 하나님께로의 길을 열어 주는 유일한 대제사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 제사장은 바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는 신앙적 근거는 무엇인가? 아론의 제사장직과 비교해 대제사장의 직분의 우월성은 무엇인가?

1) 멜기세덱적 대제사장의 신앙적 근거

히브리서 5장에서 인용한 시110:4과 창14:17-20이다. 시110:1의 인용에서 확장된 4절의 인용은 히브리서의 독특한 신학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멜기세덱이 여러 왕들을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그를 축복하는 창세기 14장의 장면은 멜기세덱이 아브라함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아론의 제사장직보다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이 우월하다. 그러나 멜기세덱은 족보가 없다. 그는 시작과 끝이 소개되지 않는 제사장으로 그의 제사장 직분은 영원성이 있다. 이렇듯 멜기세덱은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제사장이며 왕으로서의 예수그리스도의 모형이다.

2) 대제사장직의 우월성

예수는 모든 민족들이 기다려온 인류의 참제사장이시다. 그의 제사장직은 레위 계통의 불완전한 계속적 속죄의 필요성을 지닌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들에게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사도이시며 인간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중재자이다. 그는 하나님의 맹세로 세워진 제사장이며, 그의 제사장직은 양도할 수 없는 것이다. 조그마한 흠이 없는 온전한 분으로서 그의 제사는 완전한 것이었다.

히브리서는 예수그리스도의 대제사장직을 설명하고 있다. 그분의 대속적 사역은 단번에 이루어진 영원한 효력이 있는 완전한 제사이다. 그는 새 언약의 지성소인 하늘 성소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신다. 이 놀라운 사실은 날마다 우리의 가슴을 벅차게 한다. 이제 우리는 예수안에서 언제든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 이는 우리에게 막힌 담이 그리스도로 인해 허물어진 그의 영원한 속죄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율법보다 뛰어난 그리스도(8장-10장)

본 연구에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옛 언약이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새 언약으로 대체되었음을 설명한다. 본서의 저자는 모세의 율법으로 말미암은 모든 제사 제도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이제 예수의 영원한 속죄로 인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산 길'이 열렸으므로 죄사함을 받은 성도들이 신앙의 인내를 가지고 살아야 함을 권고하고 있다.

1. 새 언약의 중보자(히8장)

본 장에서는 새 언약에 따른 새 제도를 위한 것으로 제시히고 있다. 저자는 본 장에서 옛 언약은 낡아 없어지는 성격의 것이지만, 새 언약은 이후로 영원토록 우리에게 적용되는 불변의 언약이라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어떤 분인가? 새 언약의 필요성은 무엇이며, 그 특징은 무엇인가?

1) 하늘보좌에 앉으신 대제사장

본 장에서 저자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있으며 하늘 위엄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성소와 참장막에서 봉사하신다고 말한다(히8:1,2). 이 말씀은 예수께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후 하늘 성소에 들어가셨으며, 그곳에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심으로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여기서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는 말은 예수의 왕권을 의미한다(계19:16). 따라서 하늘 보좌에 계신 대제사장 되신 예수는 세상을 통치하시는 왕일 뿐 아니라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하늘나라에서 간구하는 분이시다(히7:25). 첫언약은 예레미야 당시부터 새 언약으로 대체될 날을 바라보고 있으며,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패역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제시하신 약속이다.

2) 새 언약의 은혜

하나님 자신과 맺은 언약을 온전치 못한 것으로 만든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친히 중보자로 오게 하셨다. 독생자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몸을 깨뜨리시고 피로써 새 언약을 세우신 것이다. 이 언약은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는 언약이 아닌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은혜의 언약이다. 새 언약의 우월함과 위대함이 여기에 있다. 성도는 거룩한 행실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2. 영원하고 온전한 희생제사(히9:1-10:18)

본문은 옛 언약이 가지는 가치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자신의 본래 의도인 더 좋은 언약의 필요성을 증거한다. 또한 옛 언약의 성취를 위해 그리스도 죽음의 필연성을 강조함으로써 율법을 좇아 드렸던 옛 제사의 불완전성과 그리스도의 일회적 희생이 온전성을 설명한다. 첫 언약으로 말미암은 장막의 의미는 무엇인가? 율법 제사의 한계는 무엇인가?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새 언약의 은총이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율법제사와 장막

저자는 구약의 성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면서 궁극적으로 장막과 촛대, 진설병, 지성소, 법궤 등은 모두 하늘 성전의 모형이라고 말한다. 구약 성전의 제도들의 원형인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킴으로 첫 언약에 속한 예법과 제도의 약점을 발견하게 된다. 첫 언약에 있어서는 하나님과 만나서 속죄받고 은혜받으며 영광에 동참하는 것이 보편화되지 못했다(히9:6,7). 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일에 있어서의 제약을 나타내므로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한 새 언약의 필요성을 요청한다. 자신을 위한 제사를 드린 점에서도 옛 언약의 약점이 있다(히9:6). 새 언약은 대제사장이 자신을 위해 피를 드리지 않는다. 또한 옛 언약의 모든 예법은 심령보다는 육체적인 것에 강조점을 두었다(히9:10). 따라서 히9:10이 첫 언약에 따른 제도가 개혁 때까지만 맡겨 둔 것이라 하여 그 자체가 약점이 있어 반드시 개혁이 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2)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

본문은 율법이 장차 올 좋은 일, 즉 그리스도의 그림자이며 모형이므로 구약 시대의 제사는 매년 반복되었고, 그것은 단지 죄를 일깨워 줄 뿐이다. 짐승을 잡아드리는 번제와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제물로 취하셔서 율법을 패하시고 새 언약을 세우심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우리로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셨다(히9:12).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는 지난날의 죄와 앞으로의 죄까지도 모두 해결하여 준다.

3. 네 번째 경고(히10:19-10:39)

저자는 본문에서 예수의 피로 이제 모든 이들이 주님께 담대히 나아가게 되었고 대제사장 되신 예수로 인해 양심과 몸이 정결케 되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고 말한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은 무엇인가? 또한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1) 하나님께 나아가는 유일한 길

구약 시대에는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제 예수의 죽음으로 모든 성도들은 지성소에 나아갈 수 있는 담력을 얻었다(히10:19). 이제 예수는 '산 길' (히10:20)이 되시어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열어 놓으셨다. 구약의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가로 놓여 일반인은 물론 제사장들도 지성소에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이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찢어져(마27:51 막15:38) 지성소까지 나아가는 길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게 된 것이다.

2) 구원받은 성도의 삶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피로써 우리를 위해 열어 주신 길은 휘장 가운데로 열려진 생명의 길이다. 이 길을 통해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자마다 담력을 얻어 하나님이 계시는 성소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또한 이 길은 하나님과의 긴밀한 관계성을 갖는데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삶의 양태로 확산되어진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속함을 받은 성도는 참마음과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히10:22). 또한 우리가 믿는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야 하며(히10:23),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그 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를 힘써야 한다(히10:24,25).

예수의 대속 사역은 첫 언약을 완전히 새 것으로 대치시켜 놓았다. 이제 모든 불완전하고 의심스러운 것들은 지나가고 예수를 통하여 얻어진 확실한 구원과 화해를 우리들이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더 이상 죄악 세상에서 방황하거나 하나님을 단순히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담대한 마음으로 매일 발걸음을 하나님께로 향해야 할 것이다.

✔️믿음의 본 그리스도(11장-13장)

믿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믿음의 주체는 예수님이시다. 본 연구를 통해 저자는 믿음의 사람들을 보여줌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참된 믿음에서 소망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을 극복할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성도가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그리스도이며, 또한 눈에 보이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영원한 나라인 것이다.

1. 믿음의 사람들(히11장)

독자들은 긴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으며(히10:32-34), 그로 인해 안식과 보상과 본향을 갈망했다. 따라서 저자는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담대하게 행동했던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 현재의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약속된 미래를 바라보게 한다.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신앙인들의 참된 믿음을 통해 저자가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인가?

1) 믿음의 본질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내용에 대해 굳게 신뢰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신약성경은 믿는 내용을 진리로서 받는 것 그리고 확신과 깨달음으로 표현되고 있다. 본문에서 언급된 믿음의 본질은 믿음의 대상이 감각을 넘은 초월 세계에 대한 확신이고 또 그 세계에 대한 믿음은 역으로 그 세계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지식을 통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 참지식에 이르는 인간 실존의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고 믿음이 반지식 또는 비이성적이란 것이 아니다. 믿음은 지식의 차원을 넘은 대상에 대한 지식 이상의 확신을 말하는 초이성적인 것이다.

2) 믿음의 모범들

장차 이루어질 약속에 대한 소망을 바라보며,한평생을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히11:38)을 지니고 살았던 구약의 성도들에게 주어진 가장 귀한 복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증거'(히11:39)였다. 그러나 신약의 성도들은 하나님 사랑의 실체를 보았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성령을 받았다. 이렇듯 기자는 믿음의 사람들이 불확실한 계시와 섭리 속에서도 보여 준 놀라운 믿음의 모범들을 독자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처해 있는 신앙의 어려움을 너무도 확실히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으로 극복하기를 원하고 있다.

2. 소망의 능력(히12장)

본 장에서는 현재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믿음 생활을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신앙의 경주자의 자세는 무엇인가? 시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다섯 번째 경고는 어떤 내용인가?

1) 믿음의 경주자

히브리서 11장에서 강조해 온 믿음의 선진들의 좋은 증거를 보여 준 저자는 독자들에게 경건과 신앙에 대한 보다 실제적 교훈을 주고 있다.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생활을 경주로 비유하면서 경주에 임하는 진실한 태도를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는 것과 '인내'(히12:1)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경주자는 인내로써 경주해야 하지만 우리는 인내하기에 너무나도 많은 제한과 언약을 지니므로 인내의 표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독자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따라서 기자는 징계와 책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사이가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임을 나타내어 '아들됨' (히12:6)을 강조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식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과 사랑을 시사하는 것임을 강조한다.

2) 배교에 대한 경고

저자는 이제 다섯 번째의 경고에서 언약의 두 장소를 대조하여 새 언약의 우월성을 증거함으로써 독자들의 불경건을 경고한다(히12:18-24). 이제 영존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성도로서 감사와 기쁨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히12:25-29).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나라는 의로운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들어가는 나라이기에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이미 하나님 나라가 약속되어 있다.

3. 사랑의 능력(히13장)

히브리서 11장과 12장이 믿음과 소망에 대해 다루고 있다면 본 장은 사랑의 실천적인 면으로써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의 모습과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은 자로서 행해야 할 바른 실천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예배는 무엇인가? 참된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또 저자는 어떻게 마지막 마무리를 하고 있는가?

1) 진정한 예배

구약 시대에 성전은 예배의 장소로서만이 아니라 구원의 중심지로도 이해되었다. 그러나 예수는 추방당하고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광야와 같은 곳에서 죽으셨다. 구원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실천적 면을 내포한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을 유대교의 선민 사상과 같은 사적 소유나 개인적 특권으로 해석해 왔다.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교회를 배타적 공동체로 만들었다.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그가 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죽으신 그곳으로 따라나서는 것을 내포한다. 즉 백성을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가 있는 그곳으로 나의 삶을 헌신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예배란 첫째, 성문 밖에서 고난당하신 예수로 말미암은 감사의 찬미를 드리는 일이요(히13:15), 둘째는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아가 나눔과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다(히13:13,16).

2) 참된 신앙인의 삶

성도는 '성문 밖에' 현존하시는 예수께 나아가 임시 체류자로서의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께 참된 찬양의 제사를 올릴 수 있다. 그 삶이란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신' (히2:17) 예수를 본받아 사랑과 신실함을 구현하는 삶이다. 이런 삶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 자신까지도 희생하는 '능욕을 지는'(히13:13) 삶의 자세가 요청되며 이러한 삶이 바로 거룩한 삶의 모습인 것이다.

독자들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 이제까지 저자는 독자들에게 책망과 격렬한 어투로 여러 충고들을 하였다. 또한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전개를 통하여 유대교와 비교할 수 없는 기독교의 우월성을 논증하였다. 그러나 저자는 지금까지의 자신의 권면과 책망 그리고 논증들이 결코 사사로운 감정에 의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 성숙을 위한 교훈이었음을 말한다. 따라서 수신자들은 이 말을 시비없이 받아들여 주었으면 하는 양해의 말을 부드러운 어조로 피력하고 있다(히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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