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치유의 신학적 의미
/ 한국 장로회 신학대학원 주제 발표에서 옮김...
Ⅰ. 서 론
A. 문제 제기와 연구 목적
과학이 발달하면서 지리병의 치료 기술이 심도깊게 개발되고 의료 기관도 많아지고 있다. 또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물질적인 안정을 누리게 되면서 의료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기회도 더욱 많아졌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은 여전히 남아있고 그 종류도 줄어들지 않고 있다. 육체적, 정서적, 영적인 부조화와 고통을 호소하는 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우리 주위에 많이 존재한다. 과학, 의술의 도움으로 치유될 수 없는 불치, 난치병이나 심리적인 치유로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인 병은 모두 신앙적인 차원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다.
또한 육체적인 질병에 걸린 자들은 모두 정서적이고 영적인 고퉁을 함께 경험하게 된다. 자신감의 상실, 소외감, 불안, 두려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의문 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병자들에 대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한만큼 효과적으로 능력있게 주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복음 전도와 교육과 치유의 삼중적인 사역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회는 주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는 복음 전도와 교육은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으나, 질병을 치유하는 면에서는 그 활동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한국 교회는 부흥회, 총동원주일, 등을 통한 복음 전도 활동이 왕성하고, 벧엘, 크로스웨이 등의 성경 공부는 강조되고 있으나 치유의 봉사에는 이러한 관심이 약한 형편에 있다.
교회는 병원과 같은 곳이고 교인들은 의사와 같은 사람들이라고 본다면 의사가 과학적 지식과 기구나 약을 사용해서 질병을 치유하듯이 성도는 신학적 지식과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서 치유해야 한다.
인간의 건강은 전인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지고 여기에는 육체적, 정서적, 영적인 요소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의사는 주로 육체적으로 손상된 기능을 회복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전체적 건강의 회복을 추구하는데 반해 목회자와 교회는 영적인 면에서의 치유를 통해 전인의 구원을 도와야 한다.
예수님의 치유와 사도들의 치유의 기록은 그 때에만 가능했던 것은 아니고 오늘날도 동일하게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 건전한 원리와 방법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질병중에서 고통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곁에서 도움을 요청하고 있고 목회자와 교회는 치유에 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 질병의 치유을 위한 적극적인 봉사와 섬김을 잘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논문은 신/구약성서를 통해서 질병과 치유에 관한 근본적이고 신학적인 이해와 목회적 치유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질병과 치유
A.치유의 의미
인간의 질병은 창조된 원형으로서의 인간 본래성의 상실된 모습이다. 즉 죽음과 부패와 허무에 노출죈 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창1:26)을 잃어버렸다고 하는 면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본래적 인간의 온전한 건강과 조화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육체적 건강, 정신적, 영적, 사회적 조화의 관계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특징이었다. 이것이 파괴되고, 왜곡되어진 것이 곧 질병이라고 본다면, 차유란,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치유는 본래적인 온전함을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회복의 의미로서의 치유는 어느 한 부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전인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투니어(Toumier)는 엘룰교수의 말을 인용하면서 "치유란, 언제나 육체적인 동시에 영적이다."고 했다. 즉, 치유는 몸, 정신, 영혼의 합일로 이루어지며, 지, 정, 의가 완전히 조화된 전인의 관점에서의 회복을 의미한다.
또한 치유는 과거의 온전한 상태로의 단순한 회복만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나은 상태로의 '성장'의 개념을 그 안에 함축한다. 투니어는 "진정한 치유한 단지 질병의 회복 단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질병의 회복이후 계속적인 삶의 자세까지 연관시켜서 하나님앞에서 헌신자의 삶을 사는 것을 완전한 치유"로 보고 있다. 그는 "회복된 건강을 어떻게 할 것이냐하는 것은 건강 그 자체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힐트너(Hiltner)는 "치유란, 다시 회복하는 일을 말한다. 방향이나 스케쥴에서 손상(병)입었던 기능적 불완전성을 다시 회복하여 회복이전 단계보다 한단계 더 발전한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B. 질병의 원인
1.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
빌리그레함(Billy Graham)은 질병의 원인을 " 우리 삶의 모든 병, 모든 잘못 또는 질환은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가 원죄때문이다."고 말한다.
불룸하르트(Blumhardt)는 많은 질병의 뿌리는 죄를 용서받지 못한데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즉, 질병과 죄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구약성서에는 질병은 '죄로인한 것'이라는 말씀이 자주 나온다. 신명기 28:20-22에 보면 죄악을 범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여호와께서 염병과 폐병과 열병과 갖은 재앙을 내리실 것을 경고하고 있다.
시 107:7에는 "미련한 자는 저희 범과와 죄악의 연고로 고난을 당하매"라는 말씀도 있고 시38:5에는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라고도 했다.
신약성서에서도 범죄와 질병은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요5:14의 38년된 병자에게 예수께서는 "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도록 죄늘 범치말라."하셨고, 막2"1-12의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하는 말씀을 볼 때 육체적 질병과 영적인 질병, 죄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2. 하나님의 섭리
우리는 논리적으로 다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병이 있다. 출4:11을 보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료"하고 했다. 요한복음 9장에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소경된 이유을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3절에서 "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하신 질병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이라고 볼 수 있다.
3. 사탄
어떤 질병은 그 근원이 사탄인 것도 있다. 누가복음13:11-13절에는 십팔년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어떤 여인의 치유 사건이 나온다. 이 여인의 치유는 사탄의 매인바에서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풀려났을때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마17:14-18에도 귀신들려서 간지리을 앓는 아이를 고치신 사건이 나온다. 이때에도 예수께서 귀신을 꾸짖어 내어 쫓으시니 아이가 나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의인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사탄으로 하여금 질병을 가져오게 허락하시는 경우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욥의 경우에서 발견된다.
욥은 의인이요, 범죄하지 않았지만, 사탄이 찾아와서 아프게할 때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까지 악창이 나서 괴롭혔다.(욥2:7)
바울과 같은 경우에는 너무 교만하여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잘 드러나게 하기 위하여 사탄의 사자, 곧 질병을 얻게된 경우이다.(고후12:17)
바울은 자기몸에 있는 질병이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 자신의 연약함가운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케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허락하신 것임을 기도가운데 깨달았다.
4. 스트레스
정서적인 면에서의 스트레스가 몸에 심각한 질병을 끼칠 수 있다. 리챠드 메이유는 그의 저서에서 케너스 펠레터(Kenneth Pelltier)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주장을 편다. "스트레스로 기인된 의학적 그리고 심리적 질환들은 지난 10젼간 으뜸되는 건강 문제가 되었다. 한 표준적인 의학 교과서는 모든 질병의 50내지 80퍼센트가 스트레스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추산한다. 최근 몇 년동안, 네가지병 - 심장병, 암, 관절염 그리고 기관지염같은 호흡기 질환들 - 은 미국이나 서부 유럽과 일본의 진료소에서 너무나 많이 발견되고 있는 까닭에 그러한 병은 "문화병"이라고 불려지게 되었다. 그러한 병의 번성의 원인은 무절제한 식사습관, 오염 그리고 가장 중요한것으로,현대 사회의 증가된 스트레스이다." 정서적인 스트레스에 기인된 질병들은 흔히 스트레스를 제거함으로써 치유의 도움을 받는다. 시편32편은 다윗의 신체의 고통 원인이 밧세바와 지은 죄에 대한 죄의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시32:3-5)
다윗이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마음의 평안을 되찾았을 때, 그는 신체적 질병도 회복했다. 이러한 스트레스는 결국 넓게보면 건전한 관계성의 깨어짐에서 기인하는 것이므로 죄성이 원인이 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주변의 불건전한 환경
사람이 건강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면, 주위의 환경공동체게 건강해야만 한다. 주위의 환경이 너무 편리하고, 안락해도 육체적, 정신적 약화가 일어나며, 너무 신경을 자극해도 그 결과로 공포, 반항, 후회, 좌절등이 올 수 있다. 무력과 분노와 정서적인 억업과, 모든 종류의 해로운 감정으로 가득찬 고통스러운 가족 생활속에서는 정신과 몸이 만성적으로 병들게 되며, 그러한 건강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질병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많다.
C. 치유와 구원의 관계
1. 전인적인 치유
앞에서 본대로 치유는 왜곡된 결함 상태의 회복와 그것으로 인해 이전 상태보다 더울 나아지는 성장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때 말하는 인간의 치유 대상인 왜곡된 상태는 흔히 육체적 불완전한 상태만이 아니다. 인간은 전체적으로만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즉 육체적 질병은 곧 정신적인 혼란과 영적인 문제를 제지하게 되며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은 그것과 더불어 생의 재발견, 인격의 재체계화,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 회복을 지향해야 한다. 전인적인 치유는 그래서 종교적 깊이와 차원을 갖게 되어 구원 개념과 연결되게 된다.
폴틸리히는 "구원은 근본적으로 그리고 원칙적으로 치료이다. 다시 말하면 꺾어지고 와해된 것을 성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고 말했는데 그는 인간을 전인적인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서 육체의 치유가 전인의 회복과 성장을 추구하게 됨으로서 곧 구원과도 같다고 주장한다.
2. 치유와 하나님의 나라
치유는 곧 구원과 같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 확증될 수 있다. 즉 치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사건과 같다는 것이다. 치유가 일어는 곳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눅10:8-9에 보면 "어느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영접하거든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 거기 있는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하기를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하라"이 말씀은 예수님이 70명의 전도자를 파송하시면서 당부한 가르침이다. 여기에 보면 질병의 치유는 곧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예표요 증거이다. 곧 질병이 치유되는 곳에 구원이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3. 치유와 메시야 임재
또 구원의 메시야가 오실 때에 이루어지는 특징이 곧 치유 사건임을 말하는 구절이 있다. 눅7:20-22 말씀에 보면, 세례 요한이 예수께 묻기를 당신이 메시야이심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를 묻는 것에 대한 대답이 나온다.
"저희가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 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구원의 메시야가 자신의 정체성으로서 제시한 것이 곧 질병의 치유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치유는 곧 구원과 같음을 알 수 있다.
4. 치유받지 못한 상태와 구원
이러한 관점에서 치유를 이해할 때 우리는 또 한가지의 문제를 갖게 된다. 즉 질병의 원인이 죄와 사탄으로 말미암았을 경우에는 그 죄를 회개하여 용서받고, 사탄의 축출을 경험할 때 치유를 받을 수 있고 이로 인해 구원 받았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질병의 이유가 앞에서 본 것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과 의도에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때는 과연 그때도 치유만이 구원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질병은 치유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구원 받은 것이 아닌가?
이런 문제에 대한 예로서 사도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도 바울은 치유의 능력이 상당한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을 치유한 기록이 나온다. 심지어는 죽은 유두고를 살리기도 했다.(행20:7-12)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질병은 고치지 못했다. 그에게는 육체의 가시와 같은 질병이 있었다. 그는 이 질병의 치유를 위해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 했으나 하나님이 고쳐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고후 12:19a)
이러한 응답을 받은 바울의 반응은 어떠했는가가 중요하다. 그는 치유을 받지 못한 것으로 인해서 절망과 탄식에 젖어 있지 않았다. 곧 구원받지 못했다는 슬픔에 빠진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세도 구원의 감동을 누렸다. 곧 고후12:9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라고 고백한다.
그는 병고침을 받지 못했으나 기쁨에 넘쳐있었다. 이것은 육체적인 면에서의 치유만이 곧 구원이라고 하는 단순한 논리의 한계를 극복하는 한 예이다.
구원의 감격은 하나님의 의도와 내게 주신 은혜를 깨달을 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꼭 병이 낫지 않아도 하나님이 내게 질병을 허락하신 이유을 깨닫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을 때 그는 치유의 경험이상의 구원의 감격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고후 12:7에서 자신의 육체의 가시 곧 질병의 이유을 이렇게 이해한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바울의 육체의 질병이 자신의 교만을 막는 목적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믿음과 자각이 있다면 치유 여하에 상관없이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요 구원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불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치유는 구원의 표시일 수는 있으나 유일한 표시일 수는 없으며 구원은 치유를 포함한 더 큰 개념임을 이해할 수 있다. 구원이란 메시야의 임재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뜻만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상태이다. 이 구원은 앞선 두가지 면(메시야 임재와 하나님나라의 도래)에서는 육체적 질병의 치유를 그 특징으로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면에서는 치유받지 못한 상태에도 구원이 이루어진 것일 수 있다.
즉 구원이란, 질병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성이 회복되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며 조화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Ⅲ. 성경에 나타난 치유
A. 구약에서의 치유
구약성서에서의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최초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져 숨었을 때부터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 오시며 이 관계의 회복을 꾀하시고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분이셨다. 하나님과의 단절로 말미암은 영적인 죽음과 질병에서 인간을 치유해 내시는 최초의 치유자는 하나님이셨다.
구약성서에서의 질병은 하나님의 형벌, 저주, 채찍, 혹은 은총을 위한 시련으로써 나타난다. 이러한 질병에서의 치유는 반드시 속죄와 하나님의 은총으로서의 구원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치유는 사실상 구원과 그 의미에서 같다고 하겠다.
하나님은 자기를 소개하실 때 친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치료하시는 사건들이 등장한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연고로 아비멜렉의 집 여자들이 태문이 열리지 아니하였다.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그 아내와 여종을 치료하셔서 생산케 하셨다.
모세의 지도자 직분을 의심한 까닭에 미리암이 문둥병에 걸려서 고생을 하게 되었다. 모세가 그를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이 그를 치료해 주셨는데 7일간 격리되었다가 다시 회중에 들어올 수 있었다.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되자 얼굴을 벽으로 향하게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를 치료하여 살리시고 십오년의 생명을 더 연장시키셨다. 나아만의 문둥병이 엘리사의 명령에 따라 요단강에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므로 깨끗하게 치유되었다. 느부갓네살왕은 하나님께서 그를 치신지 칠년뒤에 - 하나님의 약속하신 시간표에 따라 - 병이 나았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원망하여 백성중에 염병이 시작되었다. 이 때에 아론이 기도함으로 염병이 그쳤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매 불뱀에게 물리게 되었다. 불뱀에게 물리면 죽고, 병이 들어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모세가 기도하매 놋뱀을 쳐다보는 사람이면 전부 치유되었다.
사울이 악신에게 괴로움을 당할 때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연주하자 사울이 치유되었다. 엘리야는 죽은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는데 그가 살아났다.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던 사르밧 과부의 여인의 아들이 죽게 되었다. 엘리야가 죽은 아이를 그의 어머니 품에서 취하여 안고 그가 거처하는 다락방에 가서 뉘어놓고 기도할 때 죽은 아이가 다시 살아났다.엘리사는 죽은 수넴 여인의 아들을 살려 주었다. 엘리사의 묘실에 던져진 시체가 엘리사의 뼈에 닿자 곧 회생하여 일어섰다. 욥의 악창이 치유되었다.
이와 같은 구약의 치유 사건들을 통해서 볼 때 구약의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치유의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약성서에서의 치유는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과 용서하심이 나타나 있는 뚜렷한 구원의 징표였다.
B. 신약에서의 치유
1. 예수님의 치유
구약의 하나님이 치유하시는 하나님이시듯이 신약의 예수님도 치유를 베푸시는 분임을 4복음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살펴보자.
a. 예수님의 치유의 목적
그리스도의 치유 사업들은 모두가 참된 메시야로서의 예수의 정체성 확인에 기여했다. 병고치시는 기적들은 단지 사람들의 육체적 유익만을 위해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말씀을 통해서 이점을 이해할 수 있다.
마8:16-17: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이사야 53장 4절의 말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거늘"의 메시야적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마9:6.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여기서는 예수님의 치유의 목적이 메시야로서의 죄사함의 권세를 증거하기 위한데에 있다.
요11:4.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하시더라."
그리스도의 치유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이 있다.
b. 예수님의 치유 방법의 다양성
구약의 치유 사례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하셨다.
① 예수님께서 만지심(안수)
이 치유는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있을 때 예수께서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즉시 일어난 사건에서 드러난다. 예수님은 병자의 손을 만지심으로 완전히 치유하셨다.
이 여인은 그 즉시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었는데 이것은 열병 이후의 병약한 후유증이 전혀없이 즉각적으로 온전히 치유된 것을 보야준다. 그리고 눅22:51에서 예수는 말고의 상처를 만져 주심으로써 그의 상처를 치유해 주셨다.
② 말씀으로 고치심
요5:2-9에 나오는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를 향해서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여 주심으로 그 사람을 고쳐 주셨다.
요4:46-54에는 왕의신하의 아들이 병들었을 때 간청하는 신하를 향해서 예수님은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아들의 병을 고쳐 주셨다.
마8:5-13에는 한 백부장의 종이 병들었을 때 간구하러 나온 백부장에게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 즉시 그 병을 고쳐 주셨다.
마12:9-13에는 성전에 있던 한편 손마른 자에게 예수님이 "손을 내밀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고쳐 주셨다.
마15:21-28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자신의 딸이 귀신들려 앓는 것을 고쳐 달라고 간청할 때 예수님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딸을 고쳐 주셨다.
눅4:31-37에서 예수님은 갈릴리 회당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보셨을 때 그 귀신을 향하여 꾸짖어 가라사대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라고 말씀하심으로 그 귀신을 내어쫓고 귀신들었던 사람을 온전히 치유하셨다.
눅17:11-19에는 열명의 문둥병자가 예수님에게 치료를 간청하자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라고 말씀하여 주심으로서 이 말씀을 순종하는 문둥병자들이 다 깨끗함을 받았다.
③ 안수와 말씀의 능력으로 고치심
눅7:11-17에서 예수님은 나인성 과부의 독자가 죽었을 때, 먼저 그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죽었던 그 청년을 살려 주셨다.
눅13:10-13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18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를 고치셨다. 그때 먼저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라고 말씀하여 주신후에 안수하실 때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다.
눅5:12-13에서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오 치료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실 때 곧 문둥병이 치유되었다.
막5:21-43에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이라고 말씀하살 때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걷게 되었다.
④ 병자가 예수님의 옷을 만짐으로서 치유됨
마9:20-22에서 열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뒤로 와서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는 믿음으로 그 겉옷가를 만질 때 나음을 입었다.
⑤ 예수님이 침과 진흙을 사용하심
막8:22-26에서 벳세다에서 소경을 만나셨을 때 예수님은 그 소경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여 고치셨다.
막7:31-35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예수께 데려왔을 때 예수께서 그 사람을 고치실 때 손가락을 그이 양귀에 넣고 침뱉아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하늘은 우러러 탄식하시며 "에바다"(열리라) 하심으로 치유하셨다.
요9:1-7에서 나면서 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 예수님이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을 순종한 소경이 나음을 입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은 다양한 방식으로 치유 사역을 이루셨으나 예수님의 가장 일반적인 치유 방법은 병든 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과 그들의 몸에 손을 대시는 것이었다. 예수는 이 두가지 방법들을 개별적으로 사용하실 때도 있었지만 종종 이 두가지 방법들을 함께 사용하기도 하셨다.
또한 예수의 치유 기사들 중에서 예수께서 침과 진흙을 사용하셨던 적도 있는데 침은 그 당시에 있어서 치유의 수단으로서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침을 직접적인 치유 기능을 지닌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자신의 인격적 권능의 매개체로 사용하셨다.
예수의 치유는 의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으로 간주될 수 일쓴 외적인 도구나 수단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예수의 치유 방법의 본질은 성례전적이며 종교적인 것이었다.
예수는 그의 말과 행위와 태도로서 병자들로 하여금 모든 실체들의 창조적 힘인 하나님의 영과 - 즉 인간의 마음과 몸을 치유하시고 그것들을 재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영 - 교제를 맺게 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의 영의 권능은 예수를 통하여 사람들의 삶속에 파고 들어 왔으며, 이를 통하여 그들의 삶은 온전케 되었다.
c. 예수님의 치유와 믿음
예수의 치유와 믿음은 긴밀한 관계가 있다. 예수는 치유를 위하여 병자 자신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요구하시기도 했고, 믿음이 있는지를 물으심으로써 확인하시기도 했다. 예수는 백부장, 왕의 신하, 가나안 여인이 믿음으로 요청할 때 그들의 질병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고 나왔을 때 물으시기를 " 내가 능히 이 일 할 줄을 믿느냐" 라고 하시고 "주여 그러하외다" 라는 대답을 들으신 후에 "너희 믿음대로 되라"고 축복하시며 치유해 주셨다.
막9:24에서 귀신들려 경련하는 아이의 아버지의 경우에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라는 고백에서 드러나듯이 의심과 한계가 섞인 믿음에도 응답해주셨다.
치유에 있어서의 믿음은 직접적 질병을 앓는 본인의 믿음만이 아니라 이처럼 제 삼자의 믿음이 영향력을 발휘할 때가 있었고, 이 가운데 본인의 믿음은 없었을 경우에라도 치유해 주신 경우가 있다.
막2:5에서는 지붕위로 중풍병자를달아내리는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치유해 주셨다. 또 나인성과부의 아들이나 회당장 야이로의 딸, 죽은 나사로와 같은 사람들은 믿음을 표시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치유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로 보건대 치유와 믿음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치유를 위해서 믿음이 요구되기는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반드시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 고치신 많은 무리중에 상당수는 불신자들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d. 치유에서 드러나는 예수님의 인격의 특징
치유하시는 예수에게서는 아래와 같은 4가지의 인격의 특징이 드러난다.
첫째, 치유하신는 예수는 메시야이시다. 복음서 기자들은 메시야가 오셨다는 표적으로 치유의 기적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둘째, 치유하시는 예수는 선지자이시다. 복음서에서는 때로 선지자적인 말씀과 선지자적인 행동사이에 연계성이 있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선지자적 전통과 일치한다. 선지자들은 말씀을 선포했을 뿐만 아니라, 엘리야와 엘리사의 경우처럼 치유의 능력을 가지고 말씀을 분명하게 현시해 보이기도 하였다.
셋째, 치유하시는 예수는 인간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가지고 계시다. 예수가 인간을 치유하셨던 이유는 인간에 대한 순전한 사랑이었다.
넷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치유는 예수가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복음서의 신적인 증거의 일부로서 나타난다.
Ⅳ. 교회의 치유적 사명
교회는 예수의 사역을 계속하는 임무를 맡은 그리스도의 교회이기 때문에 치유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치유의 영은 예배, 성례, 설교, 기도, 성도의 교제등과 교회의 목회, 사회 사역 등에 나타난다. 이것은 교회의 일상 활동이며 모든 교회의 구성원은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교회의 선포, 교육, 구제등과 같은 사명들은 치유의 사명과 함께 이해되어져야만 하며 교회의 궁극적인 모든 활동의 결과는 치유를 가져오는 것이 되어야만 한다.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질병이 아니다. 질병에서 벗어나도록 보내주신 분이 곧 예수이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서 왜 치유사역이 필요한가하는 이유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예수는 인간이 질병의 늪에서 헤어나기를 바라셔서 우리를 생명의 길로, 구원의 길로 인도하신다.
교회의 중요한 사명은 치유이다. 인간의 삶은 항상 질병으로부터 끊임없이 위협받기 때문에 교회는 이런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위해 깊은 관심과 사명감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Ⅴ.치유의 사명을 수행하기위한 교회의 역활
교회는 영적인 치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어떠한 영향력을 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켈시(Kelsey)는 다섯가지 제안을 한다.
첫째, 교회는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는, 성령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신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지적, 신학적 체계가 없이는 지혜롭게 치유 사역에 동참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 하다. 치유 운동이 그러한 체계를 결여할 때, 그것은 감정주의나 속임수가 판을 치게 하거나 겸손을 상실케 하는 경향이 있다.
치유에 있어 성령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그런 신학을 가진 사람은 성령이 그를 사용하실수 있다는 사실에 놀란 뿐이다. 그는 치유의 가능성을 대할 때 겸손한 태도를 갖는다.
치유를 위해서 성령의 핵심적 위치를 인정하는 신학은 물질적이고 의학적인 치유 행위를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신학은 교회로 하여금 치유를 위해서 의사와의 협력도 가능하게 할 수 있고 교회로서의 본질적인 치료의 조건 즉 치유가 일어날 수 있는 영적이며 감정적인 토양을 제공하도록 이끈다.
둘째, 교회는 치유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솔직하고 정직한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교육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집단 토론을 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사람들은 단순히 듣는 대신에 질문을 하고 스스로 해답을 발견하는 것을 통해 배운다. 치유는 기독교적인 체험의 한 측면이다. 따라서 그러한 경험들에 대해 단순히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인식의 보다 깊은 차원들이 열리게 된다.
그 후 그들이 치유에세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 논의하고 실제로 치유를 경험함에 따라, 흔히 그들은 새로운 깊이를 지닌 신앙과 헌신을 발견한다.
셋째, 교회는 치유를 위해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느낌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사랑의 공동체로 알려졌다. 이러한 소속감, 이 놀라운 사랑은 초대 교회로 하여금 생명력이 넘치게 하였고, 성령의 치유의 도구가 되게 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로 부터 사랑의 공동체에 속한 자들로 불리울 수 있었다.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든 없든 간에 이방인들을 치유해 주었다.
기독교 집단이 사랑과 관심의 교제를 통해 성령의 실제에 대한 활력있는 관계를 추구하기만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적인 온전함의 표현으로서 치유될 것이다.
왜냐하면 치유는 그리스도의 본질이었던 것처럼 그러한 교제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넷째, 교역자들 및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치유 사역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일단 목사나 치유에 종사하는 평신도가 치유 사역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기초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될 때, 그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가르침, 설교 및 치유라는 세가지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만 하면 그는 치유 사역을 시작할 수 있다.
다섯째, 카운셀링과 영적 지동의 목회를 해야한다. 목사는 상담 목회를 통해 또 다른 방시기으로 영적, 심리적, 또는 신체적 문제를 지닌 개인들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도록 도울 수 있다. 우리의 영적, 도덕적 문제들은 말할 것도 없고 수많은 감정적, 신체적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는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기독교적인 지도가 적절히 요청된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교인들은 치유를 새로운 빛으로 보게된다.
Ⅵ. 교회가 추구해야 될 치유의 방법들
1. 믿 음
히브리서 11:1에는 믿음을 정의 하기를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 라고 했다.
로마서 10:17에 의하면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7에서 믿음에 대해 밝히기를 "보는 것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했다.
야고보는 약1:5-8에서 "의심하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한다.
믿음이란 이처럼 보이지 않고 불가능한 형편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그 말씀대도 의심없이 순종하는 것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에게서 상을 얻게한다.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일으킬 수 있다.
힐트너(Hiltner)는 말하기를 "신도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을 믿고, 그것에 주의하면 뚜렷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보다도 더욱 큰 힘으로 그의 곁에서 싸워 주셨고, 현재 싸우고 계시며, 앞으로 싸워 주실 것을 믿을 때, 영적 육적으로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고 했다.
예수님의 치유 사역중에는 믿음을 요구하시거나 믿음을 보시고 능력을 나타내신 경우가 많았다. 또 그 반대로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능력을 행치 않으시기도 하셨던 것이다.
2. 기도
기도는 하늘의 우리 아버지에 대한 믿음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E.M.Bounds는 기도를 정의하기를 "기도란, 하나님의 현존을 나의 현존으로 인식하여 그 분에게서 나의 모든 필요를 요구하고 그 요구가 충족되면 충족된 것을 가지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그 분의 사업을 위하여 투자하는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의 열망이다."고 했다.
믿음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실현을 기대하는 특권이라면 믿음은 기도를 통해서 표현되게 되어 있다. 이런 믿음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할 때 그 병은 치유된다.
아그네스 샌포드는 기도에 관해 말하기를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통이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치어 하나님의 권능으로 충만되어 풍요한 생명의 흐름을 받는다는 것을 의마하는 것으로 사랑이신 하나님의 무한한 생명력이 기도자를 통하여 이웃에게 흘러 들어 갈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했다.
존 터너는 "기도는 하나님이 치유의 에너지를 내어 보낼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을 채우는 것이다. 기도로서 하나님의 치유의 능력이 잘 통할 수 있도록 통로를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3. 말씀
예수님께서는 치유 사역을 행하실 때 말씀만으로도 능력을 나타내셨다. 예수님의 말씀은 생명을 창조하고 치유하는 권능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는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6:63)고 하셨다. 또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믿는자 속에서 역사한다고 했다.
오늘날도 전도나 설교, 가르침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어지는 곳에서는 영육간의 질병을 치료하며 조화와 관계성이 온전해지는 변화가 일어 난다. 말씀이 전달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며 그 영의 역사로 치유와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
육체적인 치유가 기적적으로 일어 났다해도 말씀이 들어가지 못하면 곧 다시 넘어지고 더 큰 질병이나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38년된 질병에서 나음을 입은 병자에게 말씀을 주셨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5:14)
말씀은 치료를 가져올 뿐만 아니라 치료후의 회복과 성장 그리고 더 큰 질병의 예방 능력도 가지고 있다.
4. 예배
모든 예배 의식속에는 누군가에게 어떤 종류의 치유가 일어나게 마련이다.
즉 성도의 교제를 통해 외로움이 치유되고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깨달을 때 과거의 심각한 죄책감이 치유되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 새로운 희망이 싹터 슬픔이 치유되고, 용서 받았기에 용서할 수 있게될 때 실망한 영혼이 치유되고, 하나님은 인생의 사소한 일 조차도 처리해 주실만큼 위대함을 깨달을 때 근심이 치유되고,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게 중요한가 인실할 때 자기 비하가 치유되고, 예배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발견할 때 돈에 대한 강박관념이 치유된다.
그러므로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열어놓고 깨끗함과 치유와 능력을 가져오는 성령의 파도를 받아들여야 한다.
5. 사랑
맥밀렌 박사는 말하기를 미움은 질병을 생산하는 감정이라고 했다. 우리가 다는 사람을 미워할 때 우리의 몸속에 화학적 반응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화학 반응에서 생성된 독성이 질병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몸속에 독성이 생성되지 않고 육체속에 치료하는 힘이 생산 되도록 사랑해야만 한다.
샌포드는 말하기를 사랑은 치유하는 힘이라고 했다. 사랑은 정신적인 병은 물론 육체적인 병까지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사랑은 질병속에 숨어있는 나쁜 힘을 제거한다. 신체의 저항 능력을 활성화하여 병원균의 감염을 잘 견뎌내게 도와준다. 이상구 박사에 의하면, 엔돌핀의 활성화로 암을 비롯한 성인병의 예방과 치료에 큰 효과가 있다고 한다.
사랑은 살리는 힘이있다. 요일4: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죽음과 죄에서 건져내어 살게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안에서 생명을 누리고 서로 사랑하면서 치유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6. 찬양
찬양은 치유를 가져오는 힘이있다. 찬양은 정서적인 안정을 가져오며 하나님의 영광을 임재하게 함으로써 질병을 가져오는 사탄을 내어쫓는 힘이 있다.
삼상16:23에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니라"라는 기록이 있다. 찬양은 하나님을 모셔들이게 하는 준비자세가 된다.
하나님은 찬송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주를 찬양할 때 사탄의 세력은 점점 약화되고 치유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찬양할 때에 성령이 임재하시므로 치유의 능력이 넘치게 되는 것이다.
7. 성례전
성례전을 통해서도 치유가 일어날 수 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질병을 담당하시고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으로 떡과 잔을 취할 때 예수님의 몸과 피속에 들어있는 치유의 권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성례전을 통해 죄의식에 빠진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깨닫고 마음과 육체까지도 치유되며, 주님이 나를 위해 피흘리셨다는 것을 확신할 때 자신이 부적합하다는데서 치유되며, 가장 비참함을 맛보신 주님을 통해 슬픔에 젖은 사람이 치유되고, 주님의 식탁에서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함을 믿을 때 고독과 외로움에 빠진 사람이 치유될 수 있다는 말이다.
Ⅶ. 결 론
질병 그것은 때로는 선을 낳기도 하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수도 있다. 그러나 질병 그 자체는 악이며 우리는 이생에서나 내세이 있어서나 실제적인 치유의 능력과 우리를 온전케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보다 더 많이 이야기해야할 필요가 있다.
질병에 걸린 사람들은 성경적 원리에 따라 치유받고 온전한 기능을 회복해야만 한다. 치유는 구원의 실제적 체험이며 하나님 나라와 메시야 임재의 감격을 가져온다.
오늘날의 교회는 치유를 통한 말씀의 확실함에 대한 증거가 약한 형편이다. 교회는 성경적인 치유의 이해를 통해서 열심있는 전도가 분명한 확신을 가져올 수 있고, 조화로운 영육간의 관계성이 실현될 수 있도록 치유의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노력을 기울여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은혜를 전달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성령의 치유의 은사를 소멸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추구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
병원의 치유하는 역할은 교회와의 유기적 협력 관계속에서 더욱 잘 수행 될 수 있고, 교회의 치유하는 사명도 병원을 통해서 효과적인 도움을 얻을 수 있으므로 앞으로의 치유의 사역은 공동의 팀을 이루어 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는 전도단과 교사회를 조직해서 복음 선포와 성경 지식의 가르침을 꾀하듯이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지체를 구성하여 전문적으로 치유 사역에 투신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방향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병든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을 더욱 이해하고 치유의 사명에 순종할수록 교회의 선포의 사명과 가르침의 사명은 그 온전한 고유의 분야와 기능을 다할 것이고 교회 자체가 사회속에서 건강하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 갈 것이다.
그동안 교회가 치유의 사역을 능력있게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은 초대 교회 이후 제도화된 교회가 선포와 교육에만 치우치고, 치유의 측면을 무시함으로써 교회 자체의 전체적 조화가 깨어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건강한 의사라야 환자를 돌볼 수 있듯이 건강한 교회가 먼저 되어야 이웃과 사회의 질병을 고칠 수 있다.
목회자는 성서적인 안목에서의 치유의 근거와 방법을 분명히 이해하고 교회안의 모든 활동이 치유를 가져오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치유의 신학과 봉사를 가르쳐야 한다. 권위주의를 배격하고 비합리적인 권위를 배격하는 시대속에서 앞으로 설교 말씀이나 교회 교육의 권위는 오직 바르게 회복시키고 성장시키는 치유의 능력의 나타남에 의해서 강하게 인정되고 보호받을 수 있다.
가능한 어떤 방식으로든지 질병의 치유를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이해할 때 이제는 말없이 치유의 사역을 묵묵히 해나가는 하나님 나라의 일군들이 많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추수할 일꾼이 필요하다는 말씀은 치유할 일꾼이 많이 필요하다는 말씀과 같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기도는 회심과 거룩한 삶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건강과 삶과 질병의 원인을 제거하는 방향으로도 드려져야 한다.
건강을 가져오지 못하는 전도, 교육, 기도, 교회활동은 점점 줄여나가고 건강을 증진시키는 일에 교회는 주도적으로 힘써야 한다.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도와줄 수 있는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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