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December 27, 2018

예수 탄생 전후의 유대 사회

✳️예수 탄생 전후의 유대 사회

/ 박종규 목사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

1) 유대인의 메시아 사상은 하나님이 기름을 부으신 다윗 왕과 그의 자손이 마지막까지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이방 민족까지 다스릴 것이라는 유대교적 신앙에 근거하고 있다.

2) 그러나 왕국이 멸망하자 이 신앙은 언젠가 다윗 자손 중에서 메시아가 나와서 이스라엘 왕국이 기적적으로 회복됨과 더불어 여호와의 날 즉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가 만국에 실현되는 때가 올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에 대한 믿음으로 바뀌게 된다.

3)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하는 다윗의 후손이 다시 출현한다는 『이사야서』의 사상은 주전 1-2세기 무렵 형성된 『다니엘서』와 『에녹서』 그리고 다른 묵시 문학이 묘사하는 종말론적 사상 즉 죽음과 심판, 천국과 지옥이라는 개념과 잘 어울리게 되었다.

4) 고대 이스라엘의 역사로 보면 비교적 늦은 시기에 나타난 메시아(기름부음 받은 자)란 단어는 원래 히브리어였으나 아람어로 음역되었다가 다시 그리스어로 음역되어 메시아스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토스란 그리스어로 번역되어 기독(基督) 즉 그리스도(Christ)가 되었다.

5) 유대교의 메시아 사상은 복잡하고 서로 모순되는 기원을 가지고 있어서 유대인에게 큰 혼란을 가져다주었다. 대부분의 유대인은 메시아가 정치적 그리고 군사적 지도자이고 그가 출현하면 실제로 다윗 왕처럼 왕국을 재건할 것이라고 믿었다.

6) 산헤드린에서 유대인 랍비 힐렐의 손자인 바리새인 출신의 가말리엘 의장이 예수를 메시아로 전하는 사도들에 대한 유대교 공회의 판결을 유보한 것은 어떤 경우에도 현존하는 통치 질서를 바꾸기 위한 소요 혹은 반란을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당시 유대 사회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쌔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이 소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33-41)”

📌유대의 메시아로서 예수

1) 여러 가지 기록으로 보아도 나사렛 예수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그런 메시아는 아니었다. 그는 유대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유대 보편주의자였다. 그는 지상의 왕이나 세상의 주권자와 같은 카리스마가 있는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의 화목을 위해 희생 제물로 바쳐질 자였고,말과 행동으로 모범을 보이고 삶과 죽음으로 가르치는 선생이었다.

2) 유대 사회에서 랍비로 불렸던 예수는 넓은 의미에서 현자를 뜻하는 하카밈 즉 지혜로운 자의 집단에 속하는 사람이다. 세례 요한이 지도자로 있던 에세네파의 제자들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점에서 에세네파와 가까웠지만, 랍비로 활동했다는 점에서 바리새파와도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지속적으로 바리새파의 위선을 공격했다.

3) 당시 하카밈 운동의 목적은 거룩한 삶을 유대 사회에 다시 일반화하는데 있었다. 그리고 이 운동 안에는 다음의 두 가지 주제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그것은 성전 종교로서 유대교의 존속(성전 제의의 중요성)과 율법 종교로서 유대교의 실천 문제(율법 준수의 일반화, 보편화)에 관한 것이었다.

4) 예수는 성전을 설교 장소로 활용하면서도 성전 제의의 중심성에 반대한 선지자들 특히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행동 양식을 보였다. 물질적인 성전이 불필요하다는 사상은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처럼 예수는 성전의 제의가 아니더라도 유대교 학교와 회당에서의 설교나 가르침을 통해 경건한 삶이 확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5) 율법의 실천 즉 일반인들이 율법을 어느 정도까지 준수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논쟁은 문서로 기록된 오경만을 인정하는 사두개파와 구전 전승까지 가르친 바리새파의 논쟁에서 시작하여 예수 시대에서는 하카밈과 바리새파의 논쟁으로 발전되었다.

6) 샴마이 하 자켄(주전 50-주후 30년경)이 이끄는 샴마이 학파는 정결과 부정에 대하여 특별히 엄격한 입장을 취했다. 이 입장은 일반 백성이 율법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에 이르는 것을 너무 어렵게 하였기 때문에 동시대에 디아스포라 유대인 힐렐이 주도하는 힐렐 학파와 같은 보다 실천적인 해석을 하는 집단이 나타났다.

7) 힐렐은 토라를 해석할 때 보다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개념을 사용하였다. 샴마이가 토라의 핵심이 세부 사항에 있다고 본 것에 비해 힐렐은 토라의 핵심이 정신이라고 보았다. 율법의 정신만 제대로 이해하면 세세한 일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답이 나온다고 본 것이다.

8) 율법의 준수를 묻는 이교도에게 힐렐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라고 하지 말라. 이것이 토라의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모두 그에 대한 주석이니, 자, 이제 가서 공부하세요.”

9)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는 힐렐 학파에 속한다. 그리고 힐렐이 한 유명한 말을 반복해서 인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눅 6:30)”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눅 6:37)”

📌고대 사회의 반유대주의

1) 주전 2세기 이후 유대 문학은 이방인 혐오와 반-헬라주의가 두드러지는데, 이에 맞서는 반유대주의 풍조도 만만치 않았다. 주전 1000년대 후반에 등장한 유대인에 대한 근동 고대 사회의 적대감은 주전 500년 무렵 유대 신앙이 공고화되면서 더욱 더 첨예화되었다.

2) 그리스-로마 세계는 할례를 민족의 징표로 여기는 유대인의 독특한 풍습을 야만적이고 혐오스러운 관습으로 여겼다. 그러나 할례는 최소한 사회적 교류를 방해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유대인이 가진 식사와 정결에 관한 규례는 다른 민족이나 이방 사회의 유대인에 관한 적대감을 심화시켰다.

3) 셀레우코스 왕조의 탄압이 일어나기 150년 전 즉 주전 4세기 말쯤에 헤카타이오스라는 역사가는 몇 가지 점에서 유대인과 유대교를 좋게 평가하면서도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 풍습이 불쾌하고 반인간적인 생활 방식이라고 공격했다.

4) 그 후 인류는 하나라는 헬레니즘의 보편주의가 확산되는 시기에 타 민족의 신이나 신앙을 부정하게 생각하고 그들과의 통혼을 금지하고 유대의 민족주의는 반인도적으로 비춰져 분노의 대상이 되었고, 이와 관해 유대인은 인간을 혐오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5) 헬라인들은 인류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문명화된 헬라 사회를 다양한 민족과 풍습 그리고 종교가 혼합된 곳 즉 요즘 말로 하면 공존하는 곳으로 보았고 이런 다양성의 공존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인을 인류의 적으로 규정했다. 이런 정서가 예루살렘은 파괴되어야만 하는 곳으로 그리고 유대 민족은 전멸되어야 하는 반유대주의적 관념으로 발전하였다.

6) 한 때 유대인과 동맹관계였던 로마인은 처음에는 로마 제국의 여러 대도시에 있는 유대 공동체에게 여러 가지 안식일에 노동을 면제하는 것과 같은 특권을 주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커지고 황제 숭배가 도입되면서 유대인과 로마인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가장 긴장이 고조된 알렉산드리아는 반유대주의 선전의 중심지가 되었다.

7) 알렉산드리아의 헬라인처럼 팔레스타인에 사는 헬라인들도 반유대주의자로 악명이 높았다. 헬라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도시에서 헬라인인 유대인 거주지에 들어와 방화를 일삼았고, 예루살렘으로 피신한 유대인은 분노와 적개심이 타올랐다. 결국 유대인들 중 과격파들은 팔레스타인에 주둔한 로마군을 공격하고 병사를 학살했다.

8) 예루살렘에서 로마군에 대한 대량 학살이 발생하자 시리아의 로마 총독 케스티우스 갈루스는 대규모 병력을 소집해서 예루살렘으로 진군했다. 예상치 못한 저항군에 후퇴한 로마군은 5, 10, 12, 14군단 등 네 개 군단을 재편하여 유대로 파견하고, 가장 전쟁의 경험이 많은 티투스 플라비우스 베스파시아누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9) 주후 69년에 로마 황제에 오르게 된 그는 당시 29세였던 자신의 아들 티투스에게 예루살렘의 포위와 함락을 맡겼다. 로마군의 예루살렘 공격은 주후 70년 4월에서 9월까지 계속되었다. 안토니아 요새로 돌격한 로마군은 성전을 장악하고 불을 질렀으며, 한 달 후 헤롯의 요새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포로가 된 유대인들은 학살되거나 노예로 팔리거나 각 도시의 원형 경기장에서 처형하기 위해 이송되었다.

📌그리스도인과 유대인

1) 주후 70년과 135년에 일어난 격변은 고대 유대 국가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로 인해서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두 가지 결과가 산출되었다. 첫 번째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분리이다. 바울 서신에서 나타나듯 유대교의 본질인 모세 율법은 더 이상 인류적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초대 교회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사라졌다.

2) 예루살렘의 초대 교회는 주후 66-70년에 일어난 유대인과 로마인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이 철저하게 파괴됨으로써 다수의 구성원들은 죽거나 살아남은 소수의 생존자들은 팔레스타인 이외의 지역으로 흩어지고 만다. 팔레스타인의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주류가 되지 못하고 에비온이라는 소수 종파로 전락하거나 그것도 나중에는 이단으로 규정되고 만다.

3) 여기서 생긴 공백을 헬라계 그리스도인들이 메우면서 헬라 사회 즉 로마 제국의 여러 지역에서 번창하게 되었고 이윽고 기독교 세계 전체를 대변하게 되었다.그 결과 기독교 신앙은 바울이 구원의 길로 제시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는 예수의 가르침에 명확하게 예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의 모든 초점은 기름부음 받은 메시아의 성격 즉 ‘예수가 누구인가’에 맞추어졌다.

4)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이 질문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둘 다라고 답한다. 주후 70년 후에 이 질문에 의문을 품는 그리스도인들은 없었고 이 확신은 점점 강해졌다. 이것이 유대교와 기독교와의 완전한 결별을 불러왔다. 성전 중심의 제의에 의문을 가지는 유대교인들은 있었으나 신과 인간을 가르는 엄격한 구분을 없애는 신앙 즉 예수가 사람이자 동시에 하나님이라는 신앙을 유대교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5)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할 수 없었고, 유대교인들은 그들이 예수를 죽인 것처럼 그가 사람으로 온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유대교의 본질 상 인정할 수 없었다. 초대 교회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은 하나가 되었지만, 종교로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점점 서로에게 위협적인 세력이 되고 만 것이다.

6) 예루살렘은 더 이상 유대인의 도시가 아니었고, 40프로의 시민이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유대인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 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유대인들의 수가 많아지면서 유대인의 인구가 급감하고, 유대인의 활동 역시 급격히 축소된다. 그리고 주후 7세기에 이르는 동안 유대교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엄숙주의(경건주의) 경향을 최고조로 증대시키게 된다. (폴 존슨, 유대인의 역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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