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October 20, 2016

처방전 시편 23편

🌷시편 23편 처방전

어느한 중년 신사가 있었는데, 건강에 적신호가 왔습니다.

이유없이 가슴이 답답하고 목이 조이는 것 같이 숨을 제대로 쉴 수 가 없었습니다. 소화 불량에 불면증까지 생겼습니다. 그래서 여러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단순히 신경성 질환이라는 진단 외에 도대체 병명을 알 수도 없고 증세가 나아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대기업의 간부였지만 건강상의 문제로 휴직을 하고 있다가 어느 한 병원에 다시 진찰을 받으러 갔습니다. 이번에 이 중년신사를 진찰한 의사는 조금 다른 약을 처방해주었습니다.

여기에 적힌 약은 약국에서 처방 받을 수 있는 약이 아니니 집에 돌아가서 자기 전에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이 신사는 집으로 돌아와서 모두가 잠든 밤에 그 처방전을 꺼내어 읽어 보았습니다. 그 처방전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처방전: 귀하의 신속한 쾌유를 바라며 다음과 같이 처방합니다.

🌻처방약: 구약성경 시편 23편
🌻용법 및 용량: 매일 공복에 하루 다섯 번씩 물없이 천천이 드십시오. 꾸준히 복용하셔야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이 신사가 이 처방전을 읽고서 의사가 장난하는 것 같아서 화가 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책장에 먼지 묻은 성경을 끄집어 들고, 시편 23편을 새벽에 한번, 아침, 점심, 저녁 식사전 공복에 한번, 그리고 저녁에 자기 전에 한번 읽었습니다. 하루에 5번, 일주일에 35번, 그리고 한달이 지나면서 150번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편 23편을 외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두 달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다시 암송하는데 그날 아침에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커다랗고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건물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처럼 마음 속에 있는 뭔가 묵직한 것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신사는 비로서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인생의 불행은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위가 낮아서도 아니고,
그 어떤 질병에 걸려서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은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이 없이
그동안 욕심에 이끌려 죄 가운데서
인생을 방황하며 살았던 것이
불행의 원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시편 23편은 모든 사람들에게 효과가 있는 특효약입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챨스 스펄전 목사님은 시편 23편을 가리켜

“시편 중의 진주이며 사람들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떠올리는 말씀”이라고 했고,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주석가 알렉산더 멕라렌 목사님은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 주고, 그들로 하여금 평화로운 믿음을 가지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시편 23편의 특효약으로 죄로부터 해방되고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로운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어느 신앙 블로그에서...)

감사하는 신앙

💥감사하는 신앙

초대교회의 교부들 중에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 349-407)'이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의 일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로마 정부는 기독교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크리소스톰은 기독교의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금된 크리소스톰은 그곳에서 하나님께 "주님, 저에게 이렇게 조용한 기도실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는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황제와 황후는 그를 흉악범들이 가득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 곳에서 또 크리소스톰은 "이 불쌍한 죄수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게 하시려고 저를 이곳으로 파송하시니, 주님 감사합니다."는 감사의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감옥에서도 쉬지 않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는 황제와 황후가 이제는 크리소스톰을 사형시키기로 했는데, 그때의 크리소스톰의 기도는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의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순교라고 했는데, 저 같이 부족한 자에게 그러한 영광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였습니다.

결국 크리소스톰을 존경하고 따르던 많은 백성들의 동요가 반란으로 바뀌려고 하자 황제와 황후는 사형을 중지시키고 유배를 명령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크리소스톰은 이 때, '하나님, 나를 살려 주시니, 더 살수 있게 하였으니 감사합니다.' 라고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직도 이 부족한 종이 할 일이
더 남아 있는 것입니까?
죽기까지 충성할 수 있도록
하시니 감사합니다."

무조건 감사, 한평생 감사 / 이영훈 목사

💥무조건 감사, 한평생 감사💥

중세의 유명한 카르멜수도원에 존경받는 평신도 '로렌스'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이 분은 전쟁에 나가 다리를 다쳐 평생 불편한 몸으로 지내야만 했습니다. 그는 자유롭게 걸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건져주신 것이 감사했답니다.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여기저기서 많은 일을 했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감사했습니다.

그러다가 50세에 그는 카르멜 수도원 주방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나이에 주방에 들어가 음식을 준비하는, 어쩌면 하찮게 보이고 힘든 일을 하게 됐는데도 그는 더 많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제가 준비한 음식을 먹고 많은 주의 종들이 기쁨으로 사역할 것이니 참 감사합니다.”

로렌스가 얼마나 정성껏 음식을 만드는지 모든 수도사들이 늘 마음이 기뻤습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사했습니다. 로렌스는 하나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주방일을 했습니다. 음식 하나를 만들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가장 맛있게, 매일 기도하며 연구하면서 말입니다.

그렇게 20년이 지났습니다. 주방일을 하는 로렌스는 모든 수도사들의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수도사들은 그를 수도원 원장으로 추대했습니다. 당연히 로렌스는 놀라며 사양했지요.

“아니요. 저는 평신도 직분이고, 이곳은 주의 종들이 계시는 수도원입니다. 제가 어떻게 원장이 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수도사들은 계속 권면했습니다.

“우리 수도사들이 20년 동안 당신을 지켜보았습니다. 모든 면에서 우리보다 월등하십니다. 저희가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로렌스 형제를 사랑하십니다. 우리 수도원의 원장이 되어주십시오.”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데 정성을 기울여 섬겼을 뿐인데, 그는 모든 수도사들의 존경을 받아 원장에 추대되었습니다.

이 특별한 소식을 들은 국왕 루이 12세가 그 수도원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로렌스에게 원장이 된 비결을 물었습니다.

“전쟁에서 몸을 다쳐 장애를 가지고서도 제가 오늘과 같이 행복한 비결은 섬기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섬기면서 감사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인데, 로렌스원장은 행복의 비결을 그렇게 말했습니다.

‘섬김’에는 희생이 따릅니다. 섬김에는 남다른 노력이 따릅니다. 섬길 때는 때때로 고통이 따릅니다.

섬김에는 자존심을 버려야 하고, 섬긴다는 것은 철저한 자기 부정이고 희생입니다.

예수의 삶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섬김입니다. 희생입니다. 바로 로렌스는 예수님을 닮아간 것 뿐입니다.

우리 마음이 섬기는 마음으로 바뀌면 그 때부터 자유함이 있습니다. 은혜가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감사가 있습니다.

사실 ‘감사’는 권면사항이 아니라 명령사항입니다. 성경에는 ‘감사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감사는 조건없는 감사입니다.

보통 사람들의 감사는 조건부 감사입니다. 무언가 내게 좋은 일이 있을 때, 감사하다고 말할 이유가 있을 때 감사합니다. 그러다보니 불평할 이유가 생기면 불평이 나오는 게 당연하겠지요. 조건부 삶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의 감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나같은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감사,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감사와 뿌리가 완전히 다릅니다.

“절대 감사, 무조건 감사, 한평생 감사”를 잊지 마십시오.

감사하는 만큼 믿음이 자라고, 감사하는 만큼 은혜가 커집니다.

카르멜 수도원의 로렌스 원장처럼, 섬기면서 감사가 넘치는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아봅시다.

진정한 감사와 용기 / 이영훈 목사

16세기의 위대한 신학자이며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한 때 카톡릭교회의 핍박과 생명의 위협으로 오랜 기간 동안 근심과 낙담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부인이 검은색 상복을 입었습니다.

"누가 죽었소?" 루터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이오."하고 부인이 대답하였습니다.

"하나님!" 루터가 겁에 질려 말했습니다.

"당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소?"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단지 크리스천이라는 당신이 사는 모습을 보고 말하는 것뿐이에요."

그제야 루터는 자신이 마치 하나님이 더 이상 살아 계시지도 않고 사랑으로 돌보아주시지 않는 것처럼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깊이 회개한 후에 자신의 마음과 생각을 우울함에서 감사함으로 완전히 바꾸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우리도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고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구기도 합니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두려워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용기가 없어질 때 우리는 시편을 읽으면 위안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다윗을 비롯한 시편 기자들 중 몇몇은 처절하고 무력한 시기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이 변질되지 않게 하는 공통적인 습관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했고 감사했습니다.

모든 상황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대응하는 것은 어려움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러한 상황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즉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로 볼 수 있게 합니다.

시편 30편은 다윗의 시편입니다. 다윗은 죽음에 문턱에까지 가는 위기 상황을 경험한 후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띠우셨나이다
12 이는 잠잠하지 아니하고 내 영광으로 주를 찬송하게 하심이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참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다윗의 시편 말씀을 통해 우리도 기쁨의 신앙을 회복하여 다윗처럼 하나님을 향해 신앙의 아름다운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스트레스 / 하민국 목사

🌻스트레스

/ 하민국 목사(검암 새로운교회)

세상살이는 근심의 연속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크고 작은 근심거리와 맞닥뜨리게 된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 지혜를 모아 보아도 좀처럼 근심의 환경을 벗어날 수 없을 때 인생들은 좌절한다.

근심의 환경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오히려 질병을 유발하는 원인균이 되어 온몸을 쇠약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질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임이 밝혀졌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덜 받기 위하여 여가를 즐기고 여행을 계획하며 취미활동을 하고 근심의 환경을 축소하려는 노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오랜 불황 속에서 자신만을 위하여 시간과 물질을 할애할 수 없는 서민들의 입장에서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기가 매우 힘들다. 그저 선술집에서 기울이는 소주 한 잔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서민들의 보편적 위안이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어야 하는가? 세상 즐거움 다 버린 기쁨을 믿음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크리스천들은, 그저 스트레스 속에 전전긍긍하는 두 얼굴의 世人일 뿐이다. 세상 풍조에 젖어 눈 딱 감고 왁자지껄해 본들 다음 날 찾아오는 것은 돌이키고 싶은 후회의 심령 뿐이다.

얼마 전 신학대학 학위 논문을 감수해 달라는 제자의 부탁을 받았다. 논문의 조사에 의하면 일반인들보다 크리스천들이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으며, 목회자들의 평균 수명 또한 일반인들보다 현저하게 떨어졌다.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한 결과라는 부연 설명이 덧붙어 있는 연구 결과를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크리스천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됐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3)”.

하나님께서는 스트레스를 멀리할 수 있는 환경을 인생들 스스로 배양할 수 있도록,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창조해 주시고 지침까지 마련해 주셨다. 물질의 풍요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이 믿음으로 스트레스 받지 않는 환경 속에서 평안을 공조할 수 있음을 가르치신다.

단언컨대, 하나님을 믿는 믿음만이 스트레스 받지 않는 유일한 대안임을 분명히 하신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인생들은 근심의 시간을 많이 갖는다 해서 근심을 해결할 수는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근심이 오늘에 족하다고 확언하신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마 6:27)”.

영생의 은혜를 덧입은 자들은 풍요의 환경, 권력의 환경, 안락의 환경 모든 것이 덧없는 나그네 인생길의 미련한 육신의 욕망임을 인식하는 표준율로 삶을 영위해야 한다.

크리스천들은 세상이 알지 못하는 날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살아가는 성도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을 소망으로, 천국 입성을 확신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마 24:18)”.

크리스천들에게 스트레스는,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는 시간,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시간, 그래서 믿음이 장성하는 시간이다.

불공평한 세상 공평하신 하나님 중에서 / 강하룡 지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실패할 수 있는가?
세상은 불공평해서 주눅 들게 하지만, 두려워 마라.
당신 곁엔 언제나 공평하신 하나님이 계신다.

삶이 진정 힘든가, 어려운가, 회피하고 싶은가?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고 차등이 없다.
오늘도 하나님은 당신 삶 가운데서 어제처럼 일하신다.

아브라함을 향한 사랑이나 모세를 향한 사랑이나 솔로몬을 향한 축복이나 당신을 향한 축복이나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한결같이 공평하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잘 나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특히 악인의 형통함을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쁜 짓을 일삼는 사람들이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자꾸 의심된다. 심지어 나도 저렇게 살아볼까 하는 유혹도 받는다. 시기하거나 질투가 생기기도 한다.

이럴 때 세상 참 불공평하다고 느껴진다. 신실하고 정직하게 믿음 안에서 사는데도 세상살이가 갈수록 힘들어진다. 세상이 나에게만 유독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잦다.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고 진지하게 믿는데도 불구하고 왜 이런 식으로 세상이 돌아가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

우리의 인생에 선택할 수 없는 고난이, 부조리하고 불합리하다고 여겨지는 일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는 선택할 수 없는 것을 고민하지 말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선택할 수 있다. 가족과 교회의 지체들을 사랑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하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피곤한 우리 인생에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자 살아 있는 지혜이다.

또한 우리는 고통 가운데 있을 때일수록 신실하게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 더욱 부르짖어야 한다.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사람들의 본심이 드러나고 인생이 갈리게 된다. 고통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며 부르짖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 헤매는 사람도 있다.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묻고 찾고 순종하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하기에 급급한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일하신다. 우리에게 강점이 있되 약함이 없다면 우리의 힘만으로 일하게 된다. 하지만 약함이 있기에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로 일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고 바울은 간증한다.

내면의 약함과 외적인 고난이 닥쳐올 때도 하나님을 의지하면 나의 약함으로 인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나의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함에 집중한다면 고난은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우리의 강함과 지혜는 하나님께 의미가 없다. 이미 하나님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강하시며,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시며, 온 세상에 충만하시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이다.

하나님께는 능력 혹은 지혜 있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려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의 강함이나 약함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 앞에선 전혀 의미가 없다. 그러기에 하나님만이 이 모든 인생에 해답이다.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을 위해 일하신다. 하나님이 일하시기에 당신의 실패는 하나님의 관점에선 실패가 아니다.

하나님이 소망되시기에 당신의 절망은 절망이 아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기에 세상 염려는 당신 몫이 아니다.

때때로 당신도 세상 불의와 부조리에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공의로써 심판하고 바로 세우실 것이기에, 하나님만 믿고 오직 공평하신 하나님만 바라라.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당신 인생을 반드시 반전시키실 것이다.

한 가지만 기억하라.

약함 때문에 겸손할 수 있고, 겸손하기에 실족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더한 은혜는 없다는 사실을...

(불공평한 세상 공평하신 하나님 중에서 / 강하룡 지음)

Friday, September 23, 2016

시편,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 / 로널드 B. 알렌(RONALD B. ALLEN)

🌷The Psalms, the Church, and the Worship of God / 시편, 교회,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

3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시편이 - 하나님을 사랑하는 - 믿음의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적 영향력의 중심에 서 있었음과 동시에, 이 시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 헌신과 공동체의 예배에서 공통적인 핵심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과장된 것이라 할 수 없다. 오직 우리가 속한 현대 사회에서만이 시편의 역사적 명성이 빛을 잃은 듯 보일 뿐이다. 하지만 지금도 많은 교회는 시편을 사용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그 안에서 잃어버린 예술과 시의 기쁨을 찾는다.

스코티쉬(Scottish) 교수의 시편 주석 중 한 권에는 그가 성장하는 동안 예배 시간에 시편이 계속해서 사용되었음을 보았다는 말이 나온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그는 말한다:

주일에 남자 아이들이 킬트(Kilt: 고지대에 사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입는 세로 주름의 짧은 치마)를 입는 것은 스코틀랜드의 관습이었다. 그날 나는 시편 147편 10절의 말씀으로 찬양을 한 것이 떠오른다. 물론 그것은 기도 책자(The Prayer Book Version)에 나온 말씀이었다.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그렇게 찬양하며 나는 킬트가 성경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역주: 귀여운 아이들에게 짧은 치마를 입혀 다리를 드러나게 하여 예배드리는 모습을, 하나님께선 사람의 다리를 보고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에 비추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선 안된다는 내용).

147편 10절의 나머지 부분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다리와 유사한 말(Horses)을 싫어하신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을 법한 내용이 나온다.
나는 시편과 진실한 만남을 가져보지 못했거나, 시편의 아름다움(Beauty)이나 영적인 것에 대해 과소평가 하는 사람은 시편을 사랑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물론 이 사실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원리다. 안타깝게도 내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많은 성도가 시편을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시편의 흐름을 잡아낼만한 자기 자신만의 레이더(Radar)조차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더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물론 이것은 단순히 어깨를 으쓱할만한 일이 아니라 이상의 대단한 무언가다. 바울은 교회와 자신의 집, 교외의 별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음악에 대해서 말할 때, 자기 자신을 시편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규정했다. “시(시편)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세 종류의 음악이 있다고 말한다. 우선적으로 살필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시편’이다. 초대 교회에서는 그들의 히브리어 성경의 시편을 통해 노래하며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다. 그들에게는 옛 언약의 말씀이 그리스도를 통해 인격적으로 성취된 것을 본 것보다, 시편으로 찬양하는 것이 더 즐거웠을 거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즐거움에 있어서 말이다.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가?

무엇이 이 오래된 시들로 하여금 성경의 중심에 큰 부분을 차지하게 만들었을까? 왜 시편이 그토록 중요하다고 인정받아야 하는 것일까?
바로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시편에 관심 갖고 지켜봐야 한다. 특히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더 집중해야 한다!

✔영감(Inspired)
첫째,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영감 되었다.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시 147:19)

수없이 많은 성가, 종교 음악, 찬송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그때부터 기록된 찬미의 노래들이 있는데 –사실 너무 많은 음악 장르가 있다- 그 모두가 영적이고 분명한 동기를 가지고 있으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그 찬양들은 우리에게 직접 말하고 우리를 관통하며 우리를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시편만이(그리고 다른 성경적인 음악과 찬양들만이) 하나님의 영 안에서 말해질 수 있다. 그렇게 성령 안에 있는 남녀의 노래야말로 성경의 언어로 이야기하듯 부르는 노래인 것이다. 이 사실은 그저 많은 믿음의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다. 시편은 모든 영적 노래 가사들보다 더욱 영감으로서 불려지는 노래이다.

✔실재(real)
둘째, 시편 안에는 가장 높은 곳을 향한 하나님의 백성의 열망과 소원뿐만 아니라, 가장 낮을 곳에 깔려 있는 고통과 고독, 허무함에 대한 감정들이 평행선을 그리며 나타나 있다. 이런 표현 양식은 히브리 시의 특징이다.

“나의 영혼이 주의 구원을 사모하기에 피곤하오나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나이다”(시 119:81)

시편은 거룩한 단념(divine abandonment)과 영적 환희(spiritual exaltedness)의 감정 모두를 깊이 있게 표현하고 있다. 시편은 모든 음악의 양식들 위에 실재하고 있다.

✔영향력(pervasive)
셋째, 시편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작곡되었다. 처음으로 성서에 시편을 기록한 사람은 모세인데(시 90편), 그는 주전 15세기 중반에 이 시를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바벨로 포로기를 마치고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축하던 주전 5세기에도 시편이 기록되었다(시 147편).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시 90:1)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며 예루살렘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며 ”(시 147:2)

나아가 우리는 시편을 제외한 나머지 성경의 많은 이야기를 근거하여 시편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몇 몇의 예를 들어보자면, ‘처음 기록된 시편’은 출애굽기 15장에 묘사된 홍해에서의 승전가(the Victory Song of the Sea), 사무엘상 4장에 묘사된 한나의 노래, 사사기 5장에 묘사된 드보라의 노래, 요나서 2장에 묘사된 요나의 노래, 하박국 3장에 묘사된 하박국의 노래, 이사야 12장에 기록된 천 년의 노래(the Psalm of the Millennium)이다.
시편은 구약과 신약의 ‘중간기’(between the Testament)에 유대 시인에 의해 기록되었는데, 사해 사본(쿰란 문서) 사이에서 발견된 문서를 통해 시편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입증 되었다. 신약성서 역시 히브리 시의 형식을 따르는 시편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누가복음 1장에 나오는 성모의 노래(the Magnificat of Mary)와 요한계시록(특별히 4장과 5장을 보라)에 묘사된 예배의 모습은 시편의 모습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에 묘사된 시편의 형식은 다른 말씀들의 형성에 있어서 영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예술성(artful)
넷째, 시편은 사랑스러운 예술로써 표현된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시 3:3)

분명히 시편은 은혜로움과 아름답고 학적인(scholar)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다윗이 다수의 시편을 쓰던 때보다 훨씬 전에 퍼져있던 학적인 형식이다. 그것은 화려한 기교가 아닌 표제를 붙여 표현하는 단순한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히브리 성서보다 몇 세기나 앞서 기록되었던 다른 고대 근동의 유산물들을 가지고 있다. 이집트학의 세계적 석학인 케네스 키친(kenneth Kitchen)은 고대 이집트의 시들을 연구하는 중이다. 그는 가장 오래된 시편이라고 믿는 작품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그 작품은 무려 주전 3000년의 작품이다. 그것은 명백하게 단순한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이 시는 훗날 이집트, 셈족의 시에 나타나는 평행 형식과는 다르다. 그가 말한 시기로 볼 때, 이 시는 다윗이 활동하던 때보다 무려 이 천 년 전에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성경의 시편은 언제 기록되었든 간에 문학적 예술성을 보여줌을 알 수 있다.

✔음악성(musical)
다섯째, 시편은 노래로 불리기 위해 기록되었다. 시편은 음악이다.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할지어다”(시 150:3)

영단어인 “시편”(Psalm)은 헬라어 psalmos에서 유래된 말인데, “반주와 함께 노래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를 돌아보자. 시편을 읽을 때 문자만을 읽고 있지 않은가?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성전에서 예배를 드릴 때 시편이 노래로 불러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것을 직접 경험했다.
나는 성전에서 연주된 완성된 음악이 어떤 형식인지 모른다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한다. ‘정리된 음악’(music police)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허락된 단 하나의 형식만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놀라운 사실을 알 뿐이다: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예배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해 모든 악기가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그것이 설령 이방인들에 의해 디자인되어 생산되었다고 해도 말이다.’ 성경이 기록되던 시절의 히브리인들은 이웃나라 사람들의 악기를 개조하여 거룩한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해 사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사탄의 악기’라는 말은 하나님을 위한 예배에 쓰임 받지 못한 악기를 지칭하는 말일 뿐이라고 주장해 온 것이다. 대부분의 시편 말씀은 음악을 예배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신앙 공동체를 위해 사용되었다.

✔치유(healing)
여섯째, 시편은 아픈 사람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위로해 왔다. 낙심하거나 실의에 빠졌을 때, 외롭고 절망적일 때, 그들을 돕고 이정표를 제시해 줄 성경의 말씀이 있다.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희망을 제시할 말씀, 삶의 위로가 필요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말씀,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위로 받고 있는 말씀은 바로 시편이라고 나는 믿는다.
“여호와는 나의 구원이요 나의 빛이시니”(시 27: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시 23:1)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시 121:8)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시 100:3)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 118:6)

✔찬양으로 충만(filled with praise)
일곱째, 시편은 가장 슬픈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인도하고 가장 기쁜 마음이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격려한다. 히브리 성경에서 시편은 테힐림(Tehillim)이란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복수형 명사는 ‘찬양하다’는 뜻을 가진 할랄(halal)에서 유래했다(역주-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의미의 할렐루야도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시편의 많은 시가 찬양시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찬양’의 개념이 지배적으로 나타난다. 어떤 시편은 우리가 하는 찬양을 묘사하는 시로 불리기도 한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시 146:1)

이를테면 시편 100편과 같은 시편은 사람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소리쳐 부르라고 독려”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그의 행한 일 때문이다. 시편 40편과 같은 다른 시편에서는 찬양을 묘사하는데 인도자인 다윗이 하나님의 구체적인 일하심과 기도에 대한 응답을 찬양하고 있다. 슬픔을 노래하는 시편의 주를 이루고 있는 요소 역시 ‘찬양의 언약’(vow of praise)이나 ‘찬양의 낭독’(recital of praise)이다. 시편에서 표현하고 있는 것과 같이, 성경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응답하여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대한 때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의 중심은 항상 찬양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예수 중심(Christ-centerd)
여덟째, 시편은 예수그리스도의 사역과 우리에 대해 독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나는 시편에 담긴 예언의 말씀에 근거하여 두 권의 책을 쓰고 있는데, 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관한 것이다. 이 책들은 다양한 공동체에 속한 많은 사람들의 증언을 포함하고 있는데, 우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나머지 부분을 보강하였다. 사도들은 시편에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는 것을 말하면서, 그가 시편의 중심이라는 것, 그가 시편에서 찬양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가 시편의 예언적 메시지가 지향하는 목표라는 것을 선포했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땅에 거하시는 동안에는, 고대 이스라엘의 예배에 관한 책을 읽으며 그것에 깊은 의미를 두고 살아가셨다. 시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궁극적인 의미에 대해 말하고 있다.

✔위대한 사명(A great commission)
우리에게 있어서 시편은 정말 중요한 것처럼 보인다. 21세기의 예배를 만들어 감에 있어서 우리의 혁신과 열망은, 단지 새로운 것으로 찬양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구약시대부터 전해져오던 오래된 찬양까지 사용하는 것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교회의 소중한 재산이 될 성경적 예배 음악을 새롭게 만들어 가려는 열정을 이어가자.
시편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찬양은 무궁무진하다. 결코 우리의 찬양에 있어서 삼천 년 동안 이어 내려온 음악의 양식이 포기될 수는 없다. 시편의 찬양과 악기들은 가장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형식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들이 걸어온 모든 역사를 통해 주어진 고전적인 방식으로도 노래될 수 있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시편으로 찬양해야 하고, 또 찬양해야만 한다.

마지막으로 바울의 말을 기억하자: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엡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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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B. 알렌(RONALD B. ALLEN)
신학 박사(Th.D), (D.D) 달라스 신학대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 성서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