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위일체론은 삼신론이 아니다
- 양태론의 어두운 그림자 될 수 있어...
그러나 삼신으로 보아서는 안돼
/ 김명용 교수(장신대)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기초는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이 빠진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기독교 신앙으로 보기 어렵다. 그만큼 삼위일체론은 기독교 신앙의 정수이자 뼈대이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론은 많은 사람에게 이해가 쉽지 않아서, 삼위일체론 이해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고, 일부는 이해하려다가 잘못 이해해서 삼신론으로 빠지든지 혹은 일신론으로 빠진다. 삼신론과 일신론은 고대교회 때부터 이단이었고 바른 기독교 신앙은 아니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께서 한 하나님으로 계신다는 삼위일체론은 때로는 성서와 관계없는 고대교회의 신학적 사변이라는 주장도 강하게 제기 되었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성서 안에는 삼위일체론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말 심각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기초와 뼈대가 삼위일체론인데, 이 기초와 뼈대가 성서에 없는 고대교회의 신학적 사변이었다면 이것보다 더 기독교의 토대를 뒤흔드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19c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대체로 위와 같은 사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인류를 구원하는 속죄의 죽음의 깊은 차원을 읽어내지 못했고, 예수님을 하나의 도덕적 모범으로만 이해하는, 기독교의 뼈대를 뒤흔들만한 엄청난 위험한 신학적 결론을 도출했다.
1. 삼위일체론은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교리인가?
물론, 그러하다. 성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명백히 증언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은 고대교회의 신학자들이 만든 신학적 사변이 결코 아니다. 성서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고, 역으로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서는 성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다. 성서에 삼위일체론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성서를 바르게 읽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서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요1:1). 예수님께서는 이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계셨고, 모든 피조물은 그분을 통하여 창조되었다(요 1:3). 도마는 예수님을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20:28)으로 고백했고, 요한복음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며, 성자이심을 만민에게 알리기 위해(요21:31) 쓰여지게 되었다고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에큐메니칼 공의회인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의 주도 하에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바 그대로 예수님께서 성자이시고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신조였다. 이 신조는 신학자들의 사변들이 모여 결집된 신조가 아니고,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바 그대로 예수님께서 성자이시고, 성부 하나님과 하나(요 10:30)이심을 드러낸 신조였다. “…유일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온 우주에 앞서 나셨고, 참 신이시며, 참 신 가운데 신이시며, 하나님에게서 나셨고, 창조함을 받지 않으셨고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이시며…” 삼위일체론의 초석이 된 위의 니케아 신조를 살펴볼 때, 그 핵심적인 내용이 거의 성서의 표현이고 성서적 정신의 결집이지 신학자들의 사변은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삼위일체론의 출발은 예수님께서 하나님, 곧 성자이시고, 이 성자 안에 성부 하나남께서 온전히 거하셨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즉, 삼위일체론은 ‘예수님께서 성자이시다’라는 하나의 큰 기둥과 이 성자 안에 성부 하나님께서 온전히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성자와 성부 하나님께서 하나라는 또 하나의 큰 기둥으로 형성되어 있는 교리이다.
이미 예수님께서 성자라는 사실은 성서가 언급하고 있는 대주제라는 것을 밝혔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부 하나님께서 온전히 거하셨다는 둘째 큰 기둥 역시 성서가 언급하고 있는 대 주제이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고후 5;19)라는 대단히 중요한 언급을 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셔서 세상을 자기와 화목케 했다”라고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는 바울의 이 중요한 고백이 삼위일체론의 또 하나의 큰 기둥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 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 자신의 사역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 자신의 고난이 된다. 아타나시우스가 삼위일체론을 강조할 때 그의 핵심적인 관심은 기독교 구원론의 정수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하나님은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계셨다. 하나님이 온전히 그리스도 안에 계시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은 하나님과 구별되는 어떤 사역이 되고, 인간과 세상의 구원에 치명적인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이 하나라는 성서적 증언의 신학적 체계화이지 다른 어떤 사변이 결코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기에 때문에 사도 요한은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라고 언급했고, 예수님께서도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니라”(요 14:10)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유의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하나라는 사실을 잘못 이해해서 성자가 성부이시고 성부가 성자이시다 라고 이해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런 이해는 곧바로 양태론적 일신론으로 흐르게 되는 잘못을 범하게 되는데, 이것은 고대교회에서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잘못된 이해이다.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성서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다수도 위와 같은 잘못된 전제를 갖고 있기 때문에 수없이 성서를 읽으면서도 삼위일체론의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고 오히려 말하기를 성서 안에 성부가 성자이시고 성자가 성부이시다 라는 그 어떤 표현도 근거는 없다고 한다. 물론 그런 표현도, 근거도 성서에 없다. 성서는 성부가 성자이시고 성자가 성부이시다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성서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 속에 온전히 거하셔서 성자 예수님의 역사가 성부 하나님의 역사와 동일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표현과 이 강조가 바로 삼위일체론의 성서적 근거이다.
2. 상호통재(相互通在)로서의 삼위일체론
성부, 성자, 성령께서 어떻게 한 하나님을 형성하는가에 대한 가장 결정적인 신학적 개념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이다. 이 ‘페리코레시스’라는 말은 다메섹의 요한에 의해 본격적으로 사용된 삼위일체 하나님의 일체성을 표현하는 매우 중요한 표현인데, 이 용어 자체는 다메섹의 요한이 아직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는 가짜 키릴(Ps-Kyrill)의 글에서 삼위일체를 설명하는 용어로 발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용어는 상호 침투와 공재(共在)의 의미가 혼합된 개념인데 이종성은 이 용어를 상호통재(相互通在)로 번역했는데 이 번역은 한국어로 번역한 다른 어떤 번역보다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를 가장 잘 번역한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페리코레시스’에는 관통한다는 의미와 함께 공재한다는 의미가 동시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상호통재로서의 ‘페리코레시스’는 기독론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시다는 사실을 설명할 때와 인간에게 있어서의 영혼과 육체가 상호통재적 상태에 있다는 것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되기도 했지만, 이 단어의 원래의 뜻은 무대에서 춤추는 윤무(輪舞)에서 나온 말이었다. 이 용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계신 것이 아니고, 상호 침투하셔서 성부는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거하시는 공재(共在)적 삶을 형성하고 있는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용어가 되었고 동서교회는 모두 이 용어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는 훌륭한 용어로 이의 없이 받아 들었다. 1438-1445년의 플로렌스(Florens) 공의회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통재적 삶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이 통일성 때문에 성부는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자는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령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성령은 성부 안에 전적으로 계시고, 성자 안에 전적으로 계신다. 그 누구도 다른 자를 영원의 측면에서 앞에 있지 않고, 위엄의 측면에서도 앞서 나가 있지 않으며, 능력의 측면에 있어서도 위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성부가 성자 안에, 성자는 성부 안에, 성부와 성자는 성령 안에, 성령은 성부와 성자 안에 거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통재적 삶은 고대교회가 만든 신학적 사변이 아니고 성서가 증언하는 증언 자체이다.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이 이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이 가로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요 14:7-11)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하나이신 것은 성부가 성자가 되고 성자가 성령이 되고 성령이 성부가 되기 때문에 한 하나님이 아니고(이와 같은 이론은 양태론 이단이다), 성부와 성자가 안에 거하시고 성자가 성부 안에 거하시고 성부와 성자가 성령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께서 하나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요 14:9)고 말씀하셨을 때 그 의미는 예수님이 아버지이시다는 의미가 아니고 예수님 안에 아버지께서 온전히 거하시기 때문에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고, 그런 까닭에 예수님을 본 자는 아버지를 본 자라는 말씀이셨다.
또한 성령의 경험이 예수 그리스도의 경험과 일치하는 이유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이시기 때문이 아니고 성령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재(通在)하고 계시기 때문에 성령의 경험과 그리스도의 경험이 하나인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성서는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롬 8:9)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위와 같은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를 통해서 하나의 삼위일체, 곧 한 하나님을 형성하고 있다. 삼위일체론에서 한 하나님(One God)-세 인격체(3 Persons)라는 표현을 쓸 때, 한 하나님의 ‘한’ 과 세 인격체의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면 안 된다. 이 둘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게 되면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수학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괴상한 결과, 곧 1=3이라는 모순이 등장하는데, 이 모순은 ‘하나’와 ‘셋’을 같은 평면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나오는 모순이다.
이 모순은 삼위일체론이 형성되고 체계화 될 때의 과정을 깊이 고찰하지 않은 데서 나타나는 잘못이다. 삼위일체론의 정통신조인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가 형성될 당시까지 아타나시우스와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한 하나님을 지칭할 때의 ‘한’의 대상과 세 인격체를 지칭할 때의 ‘셋’의 대상이 같지 않았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삼위일체론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한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었고, 세 인격체는 성부이신 하나님과 성자이신 하나님,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 각각을 지칭하는 용어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세 인격체이신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한 하나님을 형성하는 결정적 이유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상호통재를 통해 하나가 되시기 때문이다. 아타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왜냐하면 거룩하고 복된 삼위일체 하나님은 나눌 수 없고 그 자체 안에서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아버지에 대해 언급한다면 그 언급 속에는 그분의(아들이신) 말씀이 포함되어 있고 또한 아들 안에 계신 성령이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 아들 안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 된다. 그리고 성령께서도 말씀이신 아들 밖에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의 신적인 본성이 있을 뿐이고 하나의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그분은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관통해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신다.
아타나시우스와 캅파도키아 교부들에게 있어서의 하나의 신성(우시아)-세 인격체(휩포스타시스)라는 도식에서 하나의 신성은 삼위 하나님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이런 까닭에 나치안즈의 그레고리(Gregory of Nazinz)는 하나의 신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세분이…그 신성이다” 라고 표현했다. 즉, 하나의 신성은 세 인격체 전체를 지칭하는 표현으로, 하나의 하나님을 형성하는 근원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아타나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런 까닭에 한 하나님이 계실 뿐이다. 그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이기 때문에 신성 자체도 하나이다. 그러므로 아들에 대해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모두 아버지에 대해서도, 그분이 아버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똑같이 말해질 수 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서로 다른 인격체이시지만 한 하나님이시고 거룩한 하나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를 만들어 가심에 대한 비유로 나치안즈의 그레고리는 태양이 셋이지만 그 셋은 하나로 존재하고 있고 하나의 거록한 빛을 발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아타나시우스 역시 “삼의일체 하나님 안에는 하나의 영원한 신성이 있을 뿐이고, 거룩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드러내는 하나의 영광이 있을 뿐이다”라고 언급했다. 요약하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통재를 한 하나님이시고, 하나의 삼의일체신이시고, 하나의 거록한 삼위일체의 역사를 만들어 가신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은 성부의 영광이자 성자의 영광이고 동시에 성령의 영광인 것이다, 부활 속에는 삼위일체신의 영광이 함께 빛나고 있는 것이다.
3.삼신론과 삼위일체론
삼위일체론은 삼신론이 아니다.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체를 언급했다고 해서 삼신론이 맞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세 인격체이시지만 하나로 존재하는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면 삼신론과 삼위일체론의 근본적 차이를 알기 위해 그 차이를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세 하나님들(3 Gods)이라는 표현의 오류
삼위일체론에서는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세 하나님들(3 Gods)혹은 세 신들(3 gods)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세 인격체(3 Persons)라는 표현을 쓴다는 점을 우선 유념해야 한다. 세 인격체라는 말은 362년의 알렉산드리아 공의회에서 결정된 세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라는 희랍어를 오늘의 언어로 번역한 것이다. ‘휘포스타시스’는 독자적인 인격적 개체를 지칭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세 분, 곧 세 인격체로 번역하는 것이 바른 번역이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은 세 ‘휘포스타시스’라는 용어를 쓰면서도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니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는 “세 하나님들이 아니다”(Not Three Gods)라는 글을 발표했고, 이 글에서 우리는 성부이신 하나님, 성자이신 하나님, 성령이신 하나님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세 하나님들이라고 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캅파도키아 교부들이 세 하나님들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를 비유로 설명하면 세 개의 횃불에서 하나의 거대한 불기둥이 솟아 오르는 상태로 설명할 수 있다.
비록 3개의 횃불이지만 하나의 불기둥이 솟아오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불기둥이지 3개의 불기둥일 수 없고, 그런 까닭에 한 하나님이라고 해야지 세 하나님들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고대 교회의 교부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신 하나님은 세 인격체이시지만, 같은 하나의 동일한 신성을 갖고 계시고, 하나의 거룩한 빛을 발하시고 하나의 거룩한 삼위일체신의 삶과 역사만 있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 신들이 아니고 한 하나님이시 라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의 세 인격체성을 강조했다해서 삼신론으로 흘러가면 안 된다. 세 신들 혹은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도 적절하지 못하다. 삼신론은 세 개의 독자적인 신들을 전재하는 것인데, 곧 세 신들이 독자적인 영역을 갖고, 독자적인 활동을 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상호 충돌을 일으키는 신관인데 이런 신관과 기독교의 삼위일체신은 너무나도 거리가 있다.
📍상호통재(相互通在) 교리와의 충돌
삼신론과 삼위일체론이 충돌되는 결정적인 중요한 자리는 삼위일체론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상호통재의 교리이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세 하나님들”이라는 표현을 반대하면서 그 이유로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서로 분리되실 수 없고, 함께 거하시고, 서로 안에 거하시고 함께 일하시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신적 본성을 논함에 있어서 아버지께서 독자적으로 행하시고, 아들이 그 속에 함께 일하지 않는 경우는 상상도 할 수 없고 성령과 관계없이 아들이 행하시는 일이 있다는 것 역시 상상도 할 수 없다. ”닛사의 그레고리에 의하면 성령의 모든 일은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의 물줄기의 흐름과 같기 때문에, 서로 다른 셋이 아니고 하나이고, 하나의 삼위일체 신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활동 속에는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거하시고 계신다.
삼신론에는 상호통재의 교리가 없다.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의 안에 있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핵을 형성하는 상호통재의 교리가 삼신론에는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그러므로 세신들, 혹은 세 하나님들에 대한 교리는 삼위일체 신학이 아니다.
📍하나님의 신성의 폄하
삼신론이 잘못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삼신론은 세 신들의 독자성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세 신중 그 어떤 신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존재, 곧 절대적 존재가 될 수 없다는 한계를 지나게 된다.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어떤 신도 절대적 신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 간에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고 몰락하고, 때로는 갇히고 때로는 죽기도 한다. 도교에 나오는 천신(天神), 지신(地神), 수신(水神) 역시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 신들은 모두 자신의 영역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삼신론으로 이해하게 되면 세 분 모두 신이시지만 그 어떤 분도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절대적 존재가 되지 못하는 문제점을 노출하게 된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의 각각의 신성의 폄하로 이어지게 된다.
삼위일체론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하나님께서, 각자 모두 완전한 신성을 갖고 있다는 이론이다. 삼위 하나님은 모두,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적대적 신이시다. 아버지의 신성과 성령의 신성이 상호통재 상태에 있고 하나이기 때문에, 성령의 신성은 모든 것을 규정하는 적대적 신성이다. 이것은 아들의 신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삼위일체론은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신성을 규정하는 이론이지만, 삼신론은 결국 세 신들의 신성의 한계를 드러내는 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4. 일신론과 삼위일체론
삼신론이 잘못이고 이단인 것과 마찬가지로 일신론도 잘못이고 이단이다. 고대교회는 모든 형태의 일신론을 이단이고 잘못이라고 규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의 많은 사람은 일신론이 잘못이 아니고 정통 기독교 신학인줄 알고 있는데 이는 빨리 시정되어야 한다. 그리고 일신론과 삼위일체론은 근본적으로 다른 이론이라는 것도 빨리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 역사상에 나타난 일신론은 크게 세 가지 유형이 있다. 그 세 가지 유형은 양태론, 종속론, 양자론이다. 이 세 가지 이론은 모두 고대교회에도 있었지만 오늘에 이르기까지 정통기독교 신앙을 혼란시키는 이론으로 계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유형의 일신론 가운데 한국교회에 가장 큰 혼란을 끼쳤고, 지금도 혼란을 일으키는 대표적 일신론은 양태론이다.
양태론은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 개의 얼굴을 갖고 있고 세 가지 역할을 한다는 이론이다. 사벨리우스(Sabellius)에 의해 주장되었기 때문에 사벨리우스 이단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이단인 이유는 일신론이기 때문이다. 즉 한 분 하나님이 세 가지 역할만 하는 것인데 정통 삼위일체론의 세 ‘휘포스타시스’(인격체)의 독립성이 희생되고, 한 하나님이 옷을 바꿔 입고 얼굴의 가면만 바꿔서 세 번 나타나는 형태가 되기 때문에 이단이었다.
기독교 삼위일체 신학이 양태론으로 빠지지 않으려면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체성과 독립성이 분명히 강조되어야 한다. 사벨리우스는 세 ‘휘포스타시스’를 세 ‘휘포스타시스’라 칭하지 않고 가면 혹은 얼굴의 뜻을 가진 ‘프로소폰’(prosop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하나님은 세 ‘프로소폰’을 갖고 있다고 했는데, 바로 이 자리가 이단으로 규정되는 자리였다. 가면이나 얼굴만 셋이라는 것은 독립된 인격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사벨리우스는 세 ‘휘포스타시스’를 거부하고 하나님에게는 한 ‘휘포스타시스’만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스스로 일신론임을 드러내는 증거였고 따라서 결국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20세기의 가톨릭 신학의 아버지 칼 라너(K. Rahner)는 삼위일체론을 설명하면서 하나의 실체(Substantia)가 세 가지로 존재하는 방식이 삼위일체론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하나의 실체라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말이었고, 세 가지로 존재하는 방식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존재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성부, 성자, 성령 세분에게 적용된 ‘실체의 존재방식’(Subsistenz-weise)이라는 표현은 정통 삼위일체론의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론은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세 ‘휘포스타시스’가 분명치 않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티툴리안이 말한 세 개의 ‘페르조나’(persona)는 당시의 라틴어 ‘페르조나’가 무대에서의 배우의 가면 혹은 역할을 지칭하는 뜻을 강하게 담고 있었기 때문에 ‘휘포스타시스’의 바른 번역으로 보기 어렵고, 어거스틴의 심리적 삼위일체론 (어거스틴은 한 인간 안에 있는 기억과 지성과 의지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모습을 드러내는 어떤 것으로 모았는데, 기억, 지성, 의지는 한 인간의 어떤 측면들을 나타내는 것이기 때문에 세 인격체로서의 개체성을 가진 ‘휘포스타시스’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 역시 세 ‘휘포스타시스’를 분명히 드러내지 못하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어거스틴의 심리적 삼위일체론은 양태론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지 못했다.어거스틴은 삼위 하나님에 대한 설명을 관계(realation)라는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했는데, 이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지만 세 ‘휘포스타시스’가 전제된 관계이어야 하는데, 이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체성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상당히 불완전한 설명이었다. 그러나 다행히 종교개혁시대에 칼빈(J.Calvin)은 세 ‘휘포스타시스’를 강조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 세분 하나님의 독자적 개체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칼빈이 아타나시우스에서 캅파도키아 교부들로 연결되는, 니케아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배후에 존재하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깊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서 20세기의 개신교 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칼 바르트(K. Barth)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휘포스타시스’를 세 가지 ‘존재방식’(Seinsweise)으로 규정함으로 말미암아 라너와 똑같은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가 서방 개신교 신학계를 덮게 되었다. 물론 칼 바르트와 칼 라너는 완전한 의미에서의 양태론자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양태론이라는 비판에서 결코 자유할 수 없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했는데 그 핵심적인 원인은 세 ‘쉬포스타시스’를 일신론적 시각에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교회, 세 인격체 개념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않아
그러면 오늘의 한국의 교회는 세 ‘휘포스타시스’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을까? 이 세 ‘휘포스타시스’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면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가 교회를 덮고 교회는 이단적인 교회가 된다.
그런데 한국의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은 유감스럽게도 많지 않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의 세계의 신학계는 개신교 쪽에서는 몰트만(J. Moltman), 판넨베르크(W. Pannenberg), 토란스(T. F. Torrance), 가톨릭 쪽에서는 카스퍼(W. Kasper), 그레스하게(G. Greshake)와 보프(L. Boff)와 같은 위대한 삼위일체 신학자들의 노력으로 세 ‘휘포스타시스’의 개념을 분명히 했고 서방교회의 신학 속에 드리워져 있는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는 거의 말끔히 청소되었다.
📍세위격이라는 표현,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 될 수 있어
그러면 세 ‘휘포스타시스’란 무엇일가? 이 세 ‘휘포스타시스’란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의 개체적 인격체를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서로 다른 분이시고 개체적 인격체로서의 존재이다. 한국에서 세 ‘휘포스타시스’를 일반적으로 세 위격으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위격이라는 표현은 완전한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 위격이라는 표현은 자리가 셋이라는 의미가 강한 표현인데 부분적으로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를 느낄 수 있는 표현이다.
📍자리가 셋이라는 표현, 시벨리우스의 세역할의 표현과 비슷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그분의 자리가 셋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세 가지 역할을 한다고 주장했던 사벨리우스의 주장 사이에 어떤 유사성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안에 양태론 이단이 많이 나타나는 것도 세 ‘휘포스타시스’의 번역의 문제성과도 결단코 무관하지 않다. 영어로 표기된 삼위일체 도식인 ‘한 하나님-세 인격체’(One God-three persons)에서 ‘세 인격체’(three persons)는 삼위일체론의 원래의 희랍어인 ‘세 휘포스타시스’를 오늘의 영어로 잘 번역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은 독립적 개체존재의 인격체(person)이시지 한 하나님이 나타나는 방식이나 역할이나 자리만은 아니다. 그러나 세 인격체로서의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을 세 신들 혹은 세 하나님들이라고 표기하면 안 된다.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하나님 안에는 세 분이 계시지만, 이 세 분은 한 하나님이시지 결코 세 하나님들 혹은 세 신들은 아니다.
성부도 하나님이시고 성자도 하나님이시고 성령도 하나님이시지만 세 하나님들로 표현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강조한 고대 교회의 신조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신조였고 이 강조는 옳은 강조였다.
그러나 역으로 우리가 유념해야 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것은 삼신론의 위험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세분의 인격체로서의 분명한 개체성을 희생시키면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것을 희생하게 되면 고대 교회의 정통 삼위일체 신학에서 이탈하는 것이 되고, 칼빈의 삼위일체 신학에서 이탈하는 것이 되고, 성서가 계시하고 있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체적 역사에서 이탈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양태론의 검은 그림자가 어느덧 우리 눈앞에 나타나게 된다.
✔️결언
삼위일체론은 일신론도 아니고 삼신론도 아니고 고대 교회의 신학적 사변도 아니다. 고대교회가 유대교의 일신론과 결별한 이유는 에수 그리스도의 경험과 성령의 경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대교회가 삼심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온전히 거하셨고 성자와 성부가 하나이셨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성자와 성령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삼위일체론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체계화한 이론이고 그 핵심에는 ‘패리코레시스’ 곧 상호통재(相互通在)의 교리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 ‘패리코레시스’의 교리도 다메섹의 요한의 사변이 아니고, 사도 요한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의 자연스런 신학적 체계화였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나님은 상호통재적 삶을 통해 한 하나님이시고 하나의 삼위일체신의 역사를 이룩해 가신다.
(츨처: 통합기독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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