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론에 대한 질의와 응답
/ 노진준 목사(한길교회)
Q) 칼뱅의 예정론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되는 지 목사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A)안녕하세요.
아주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질문하셨네요.^^
워낙 방대한 문제라 아주 간단하게 답을 드릴께요.
(얼마 전 김동호 목사님도 예정론에 관해 글을 올렸다가 고생을 좀 하셨죠?^^)
혹 필요하다면 계속 질문해 주세요.
저는 예정론을 믿습니다. 하지만 예정론에 관해 오해가 너무 많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예정론을 믿으면 인간의 자유의지가 침해된다고 생각한다든지, 예정론을 결정론적인 철학적 사변으로 이해하는 것들이 이에 속할 것입니다.
제가 예정론을 믿는다고 말할 때 이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를 주관하시느지, 그 섭리가 어떻게 인간의 자유의지를 사용하는지, 하나님의 예정의 범위가 무엇인지를 다 이해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제가 예정론을 믿는다고 말할 때는 우선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시라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나 도덕적 순수함도 없고, 스스로 하나님께 갈 수 있는 능력도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 가운데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도록 해주실 때에만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제가 예정론을 믿는다고 말할 때 또 다른 의미는 역사와 존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있다는 의미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 없고, 모두 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이라서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거나 모르시는 일은 없다는 의미입니다.
Everything is in His control!!
이것이 칼빈이 강조하고 싶었던(성경이 말하는) 예정교리하고 생각합니다.
이 교리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전혀 상충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유의지가 하나님의 섭리의 부분집합이 될 수는 있지만... 다만 구원에 있어서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는 있지만 하나님을 택할 수 있는 자율적인 능력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인간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의지의 문제라면 맞는 말이지만 능력의 문제라면 맞는 말이 아닐 겁니다.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기를 바랍니다.
Q) 감사합니다. 목사님.
목사님께서 말씀하신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은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칼뱅의 예정론에서 말하는 택자와 비택자 / 택자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다는 것은 머리로 이해할 수는 있어도 심정적으로 동의가 잘 안되네요.
이것이 인간의 철저한 무능력이라는 대전제를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아서 그런건가요?^^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는 하기로 마음을 가지셨다가 마음을 돌리신 경우도 있지 않나요?
그러면 이것 또한 예정된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럴 수 있지만, 심정적으로는 인격적인 하나님보다는 기계적인 하나님으로 느껴질 수 있는데 잘못 된 것인가요?
A) 맞습니다. 제한속죄라는 말이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것도 그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요즘은 제한속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추세이기도 하지요.
원래 의도는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셨다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아야 하는 것인데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예수님의 피가 구원을 받은 사람에게만 유효해진다는 논리적 결과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시할 때에는 아직 믿지 않는 사람에게라도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죽었습니다"라는 말이 가능합니다.
복음의 제시는 우주적이라고 믿기 때문이죠. 그건 칼빈도 동의할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 믿은 사람에게만 그리스도이 속죄가 유효해지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난 사람이 예수를 주라 부른다면 그 사람들에게만 그리스도의 피가 유효해진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신 경우는 다른 주제일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바꾸었다는 말이 하나님의 불완전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또한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변심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안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는 인간의 논리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불변하심을 개혁주의에서는 비공유적, 혹은 불가해적인 속성이라고 부릅니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어떤 논리적인 결과를 선호하든, 성경을 통해 두 가지는 확실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라 지식과 능력의 한계로 뜻을 바꾸는 일은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을 기계로 만들거나 다루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이나 결정에 인격적으로 반응하시고 온전히 소통하십니다.
이 두 명제의 논리적 연결이 이성의 한계 밖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불변도, 예정에 끊임없는 의문이 생기는 하나님의 영원성도 불가해적 속성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Q)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무지한 자의 지식의 한계와 논리적 한계로 접근하니 물음표가 생기는 것 같네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선행은총과 집회에서의 불특정 다수를 향한 calling 및 영접기도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나요?
A) 선행은총(Prevenient Grace)은 웨슬레가 특히 강조를 한 것일텐데 웨슬레도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행위나 자신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에 은혜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칼빈과는 달리 이 은혜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임한 것이라고 보았지요.
간단하게 말하면 사막에서 물이 없으면 모두 다 목이 말라 죽을 수 밖에 없는데 오아시스를 만들어 두신 것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은 그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마치 오아시스와 같은 것이 되는 셈이지요. 인간의 전적인 타락은 물이 없는 상태를 가리킬 것이구요.
개혁주의의 입장은 조금 다릅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 물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 차이는 보기보다 심오합니다.
하지만 불특정 다수를 향한 calling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누구나 믿습니다. 구원이 보편적이지는 않지만 복음의 제시는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심령을 거듭나게 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일은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유효적 소명과 일반적 소명의 차이라고 부르는데 성령의 영역에 속하는 유효적 소명을 마치 우리에게 속한 것처럼 믿을 사람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월권이고 일반적 소명이 마치 성령께 속한 것처럼 전도를 하지 않는 것은 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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