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anuary 14, 2019

예정론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

❄️예정론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

/ 김명용 교수(장신대 교수)

📍서언

예정론은 사변이 아니고 복음의 총화이다. 그러나 예정론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변으로 느껴지고 복음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인 어떤 것으로 느껴지고 있다. 왜 그리할까? 그것은 전통적 예정론이 사변적인 어떤 체계를 많이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정론은 사변이 아니고 복음을 표현하는 대단히 중요한 교리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정론은 복음을 전하는 데 방해가 되는 교리로 생각하고 있다. 또한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르치는 성경과 충돌된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예정론은 공평하신 하나님과 너무나 거리가 있는 잘못된 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면 예정론은 정말 잘못된 교리인가?

우리는 이것을 밝히기 위해 먼저 전통적 예정론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반론들을 밝히고 예정론의 본질에 접근해 들어가고자 한다. 그리고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예정론의 핵심은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한다.

1. 예정의 교리 개요

예정론은 전통적으로 크게 두 개의 기둥으로 구축되어 있는 신학적 체계이다. 이 두 개의 기둥 중 하나는 선택의 교리이고 또 하나는 유기의 교리이다. 그런데 이 선택과 유기는 모두 창세 전에 일어난 인간의 참여 없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결정된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이다.

하나님은 그의 영원하시고 만고불변한 계획에 의하여 창세 전부터 구원받을 자와 멸망받을 자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 예정의 교리에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유기의 교리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창세 전에 일군의 무리의 유기를 작정하였을까? 여기에 대해 칼빈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1)

"우리는 하나님의 예정을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라고 부른다. 이러한 영원한 섭리에 의해 그분은 인간이 장차 어떤 운명으로 태어날 것인가를 결정하신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태에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사전에 정해졌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에 처해지도록 사전에 정해졌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전자의 목적이나 후자의 목적으로 창조되었을 때, 우리는 그들이 생명으로 예정되었다. 혹은 죽음으로 예정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성경이 뚜렷이 밝혀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고 불변의 계획에 의해 오래 전에 구원을 줄 사람을 정해 놓으셨으며, 반면에 멸망에 처해질 사람도 미리 정해 놓으셨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택자 야곱은 외모나 그이 여러 면에 있어서 에서와 하등 차별을 둘 것이 없었으나 하나님의 예정에 의해 유기된 에서와 현격히 구분이 된다."

위의 언급에서 우리는 칼빈의 견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칼빈은 유기 역시 명백한 영원한 하나님의 섭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칼빈은 “유기 교리를 반대하는 사람은 본인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바울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2)라고 단언했다. 칼빈에 의하면 유기 역시 성경과 성령이 증언하고 있는 확실한 진리이다.

그러면 성경은 정말로 유기를 증언하고 있는가? 칼빈은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그러하다고 언급하고 그 근거로 로마서 9장의 다음과 같은 중요한 구절들을 인용했다.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9:13-16).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게 하시느니라”(롬9:18).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19-21).

이상의 구절들은 칼빈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예정론에서 유기를 위한 성경적 근거로 대단히 자주 언급되는 성구들이다.

이상과 같이 선택과 유기로 구성된 예정론은 그 핵심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고, 오직 은총에 의한 구원이라는 매우 중요한 사상을 그 배경에 깔고 있다. 즉 인간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한,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 구원의 근거가 인간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도가 그 근저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훌륭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예정론은 간과할 수 없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우리는 그 문제점에 접근하기 이전에 먼저 칼빈주의 5대 신학강령을 살펴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칼빈주의 5대 신학강령은 전통적 예정론의 신학체계를 매우 훌륭히 반영하고 있는 교리이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5대 신학강령은 인간의 전적 무능,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된 속죄, 저항할 수 없는 은혜, 성도의 견인이다.

이중 인간의 전적 무능은 하나님의 예정과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에 기인함을 언급하기 위한 전제하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선행이나 인간들의 어떤 결단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나타내는 교리가 무조건적 선택의 교리이고,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총은 결국 제한받는 사람에게만, 곧 선택된 사람에게만 유효하게 된다는 것이 제한된 속죄 교리이다.

그리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란 선택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결코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교리이고, 성도의 견인은 선택된 사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저항할 수 없단 말인가?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할 수 있는 자유는 없는가? 성도들 가운데도 타락할 가능성은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 하나님의 선택은 정말 무조건적인가? 그렇다면 인간은 하나의 로봇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전통적 예정의 교리가 가르쳐지고 칼빈주의 5대 신학강령이 가르쳐지는 곳에서는 언제나 위와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리고 더욱 심각한 질문은 유기받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억울한 교리가 예정론이 아닐까 하는 질문이다. 그러면 예정론에 대해 지금까지 일어난 신학적 비판과 반론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2. 예정의 교리에 대한 신학적 비판과 반론들

예정론은 지금까지 수많은 신학적인 비판에 직면해 왔다. 이 비판 때문에 일부 사람들은 예정론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는 잘못된 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예정론은 잘못된 교리가 아니라 칼 바르트의 말에 의하면 “복음의 총화”이다. 예정론이 그릇된 교리라고 일부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동기는 예정론이 지금까지 교회에서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예정론에 대해 어떠한 신학적 비판이 있었는가? 대표적인 신학적 비판들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4)

(1) 예정론은 운명론이다.

전통적인 예정론에 의하면 영원 전에 하나님은 일군의 무리를 영원한 복으로, 일군의 무리를 영원한 저주로 예정했다. 따라서 모든 인류는 이미 영원 전에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축복으로 예정된 사람은 예수를 믿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지만, 저주로 예정된 사람은 예수 믿는 데 결국 실패하고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 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거스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역사는 하나님의 예정에 따라 일어나게 된다.

이와 같은 전통적 예정론은 결국 모든 사람의 운명은 영원 전에 예정되어 있고 그 예정대로 복과 저주로 나뉘기 때문에 운명론적인 특징을 갖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정론은 운명론이라는 신학적 비판에 부딪히게 되었다.5)

(2)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와 모순된다.

전통적인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이 예정한 대로 일어난다. 인간은 그 누구도 여기에 저항하지 못한다. 따라서 이 예정론은 기계론적인 특징을 나타낸다. 영원 전에 하나님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 대로 기계적으로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무의미한 것이 된다. 결국 예정론은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인간의 자유를 무시하는 잘못된 교리라는 것이다.6)

(3)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된다.

전통적인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결코 죄의 창시자도, 죄의 근원이 되는 어떤 동인도 아니다. 그러나 예정론이 갖고 있는 신학적 체계는 인간의 타락이 이미 하나님의 예정 속에 있고 인간은 이 하나님의 예정을 피할 수 없는 점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이 죄의 창시자가 되는 신학적 모순이 발생한다는 말이다.

(4) 예정론은 노력하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낙심시킨다.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이미 영원 전에 예정되어 있다면 인간의 모든 노력은 결국 의미없는 것이 된다는 반론이다.

(5) 예정론은 개인을 불공평하게 대한다.

전통적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은 영원 전에 결정되어 있다. 즉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복으로, 일군의 무리는 영원한 저주로 예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예정론의 체계를 이중예정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중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을 이렇게 두 부류로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유이다.

이것은 특히 로마서 9장의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롬9:12)는 말씀과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롬9:20-21)는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유를 이와 같은 시각에서 이해하게 되면 저주로 예정된 자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은 불공평한 분이 된다.7)

(6) 예정론은 선한 도덕에 비호의적이다.

인간의 사회적 생활에 있어서 선한 도덕은 대단히 중요하다. 선한 도덕은 사회를 유지하는 힘인 동시에 성경의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원하시는 근본적인 명령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예정론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선한 도덕의 가치는 상당 부분 상실하게 된다.

(7) 예정론은 진지하게 복음 전하는 것을 막는다.

인간의 구원과 멸망이 이미 예정되어 있다면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을까?

그러나 성경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4:2)고 언급하고 있다.8)

(8) 예정론은 보편 구원을 가르치는 성경구절과 모순된다.

예정론에 의하면 구원은 일군의 복받은 무리에만 제한된다. 그런데 성경은 만민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막16:16).

성경은 일군의 무리가 처음부터 구원에서 제외되어 있다고 결코 가르치고 있지 않다.

이상과 같은 예정론에 대한 비판과 반론들은 상당 부분 정당성을 갖고 있다. 이같은 비판과 반론이 일어난 것은 전통적 예정론이 예정론을 잘못 이해해서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정론에 대한 반론과 비판보다 더욱 중요한 반론이 20세기에 칼 바르트에 의해 제기되었다. 바르트는 전통적 예정론이 갖고 있는 결정적인 문제점은 예정론이 언급하고 있는 하나님과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이 일치하지 않고 있는 데 있다고 보았다.

전통적 예정론에 의하면 하나님은 일군의 무리를 영원 전부터 지옥으로 예정했다. 그런데 과연 사람들을 지옥으로 예정한 그런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 전부터 일군의 무리를 지옥으로 예정한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을 자신이 대신 담당하고 형벌을 받으시는 지극한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런 지극한 사랑의 하나님이 일군의 무리를 영원 전부터 지옥으로 예정하는 공포의 하나님일 수 없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만민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한 하나님의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를 선택하시고자 하시는 영원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즉, 하나님의 예정은 선택과 사랑을 베풀기 위한 은총의 예정이었지 저주를 위한 예정은 아니었다.9) 

바르트는 에베소서 1장을 기초로 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선택하고자 하는 은총의 예정이었음을 밝혔다

3. 칼 바르트의 예정론의 중요 내용10)

20C 신학에 불후의 업적을 남긴 바르트는 예정론에도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그는 1936년 헝가리와 루마니아 지방을 방문하면서 데브레센(Debrecen)과 클라우젠부르크(Klausenburg)에서 행한 예정론에 관한 그의 유명한 강연 “하나님의 은총의 선택”에서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 루터(Luther), 칼빈(Calvin), 베자(Beza)로 연결되는 전통적 예정론은 이미 규정된 운명만 강조되는 기계적 예정론으로 인간을 향한 회개에로의 진지한 부름을 헤치고 있고, 이에 상응하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자유와 주권을 해친다고 비판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예정을 고정된 어떤 체계로 바꾸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복음 전파의 절박성이 희생되는 심각한 위험을 초래한다. 바르트는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사람 곁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개혁교회 목사를 비꼬는 반칼빈주의 만화를 이 유명한 강연에서 예로 들면서 복음전파의 절박성이 희생되는 예정론의 오용을 경고했다.

1936년 이 유명한 강연에서의 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예정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저주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이 우리의 예정의 확실한 보증이다. 바르트는 1936년의 강연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믿음의 사건으로 규정하는 예정론에 있어서의 획기적인 발전을 시도했다. 

1942년 바르트는 그의 교회교의학Ⅱ,2(KⅡ,2)를 출간시키면서 예정론에 관한 새로운 거대한 신학적 체계를 발표했다. 1942년 발표된 그의 예정론은 예정론의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획기적인 업적이었다. 이 기념비적인 업적은 예정론을 은총의 총화로 이해한 것과 예정론을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러면 1942년 그의 교회교의학 Ⅱ,2에 발표된 그의 예정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으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아진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 아니고 우상이다. 영원 전에 일군의 무리를 지옥에 가도록 예정한 그런 하나님은 없다. 지옥에 가는 사람들의 이빨가는 소리가 하나님의 의를 찬양한다는 가공할 만한 교리는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그런 가공할 만한 교리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말로 변호하고 미화하면 안 된다.

영원 전에 일어난 하나님의 예정은 먼저 하나님의 자기 규정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기로 작정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나신다.

2)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는 하나님은 선택하시는 하나님이다. 인간을 버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십자가에서 계시되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그 죄의 형벌을 대신 지시고 심판을 받고 죽으셨다. 십자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이 극명하게 계시되었다. 인간을 버리기로 작정하는 전통적 예정론의 어두컴컴한 하나님의 결의는 십자가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모습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영원한 결의는 인간을 버리기 위한 결의가 아니고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선택하기 위한 결의였다(엡1:4).

3)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파악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본질이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이다.

따라서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행위는 없다. 하나님의 자유도 사랑을 위한 자유이지 그 밖의 어떤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과 위배되는 일은 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일군의 무리를 지옥으로 예정하는 천상의 폭군은 폭군일 뿐이지 십자가에서 계시된 자비로운 하나님은 아니다.

4) 하나님의 이중예정은 십자가의 사건을 뜻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인간을 선택하시고 자신을 버리셨다.11) 

교회교의학Ⅱ,2의 예정론에서 바르트에 의하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으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는 “단 한 분 버림 받으신 분”이다. 이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시고 대신 인간을 선택하시고 인간을 찾으신다.

5)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찾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자들은 현실적으로 선택된 자들이 된다. 즉 선택은 믿음을 통해서 구현화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택은 고정된 교리가 체계가 아니고 지금 일어나고 구현화되고 있는 사건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영원 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작정한 하나님의 선택은 시간 속에서 만남을 통해 구현화되는 사건이다. 그러므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이다.

6) 믿는 자들은 선택된 자들이다. 그러나 현 역사 속에는 버림받은 자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존재는 하나님이 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의 행위는 언제나 은총이고 선택이다. 그러나 이 하나의 하나님의 행위는 두 개의 결과를 초래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은 믿음의 사건을 필요로 한다. 이 믿음의 사건이 아직 일어나지 않는 곳, 즉 하나님의 자비로운 부르심이 거부당하는 곳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폐기된 버림의 그늘이 존재한다. 이 그늘이 하나님의 심판이다. 

이상과 같은 바르트의 예정론은 하나님의 예정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과 동떨어진 어떤 추상적인 어두컴컴한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결의에 그 기초를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계획과 의지가 명백하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경륜을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초점을 두고 있는 많은 성경 기자들의 사상과 상응하는 신학적 관점으로 큰 의의가 있다.

예정론은 바르트라는 거대한 신학자를 통해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인 예정론으로 그 방향이 크게 선회하는 전기를 맞게 되었다. 바르트의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고 이것을 복음의 총화로, 믿음의 사건으로 이해한 점에 큰 공헌을 남겼다. 

4. 예정론에 대한 바른 신학적 이해

한국 교회는 잘못된 예정론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그로 말미암은 피해도 상당히 심각하다. 장로교회 성도들 가운데 일부는 전도할 때 예정론을 전해서 오히려 역효과가 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러면 예정론은 과연 무엇을 언급하고자 하는 교리인가?

(1) 무시무시한 하나님이 이중예정 교리는 잘못되었다.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의 비유는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을 위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로 작정하셨다는 이방인을 선택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예정을 위한 말씀이다.

전통적 예정론은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을 위한 성경적 근거로 로마서 9장의 토기장이 비유를 사용했다. 그런데 이 토기장이의 비유는 일군의 무리를 지옥으로 예정했다는 잘못된 예정론의 근거로 사용되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강조하기 위한 비유임에는 틀림없지만 로마서 9장을 쓴 바울은 일군의 무리가 지옥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비유를 저주의 백성이었던 이방인들을 하나님이 전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의로 여기고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삼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감히 하나님을 힐문할 수 있느냐는 의도의 비유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본문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아닌 자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시기로 작정했는데 이에 대해 아무도 항별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데 초점이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육신의 자녀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시고,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유대인이건 이방인이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참된 약속의 자녀로 작정했다고 해서,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로마서 9장을 쓴 바울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9장은 전통적 예정론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무시무시한 이중예정을 전하려는 본문 아니라 하나님의 참되고 영원한 예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을 구원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은총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문이다.

로마서 9장의 내용을 더욱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초대교회가 처해 있었던 매우 중요한 문제를 깊이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초대교회는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백성일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심각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되어 있는 욥바 성에서 베드로가 경험한 환상은 이 문제의 중요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환상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큰 보자기 속에는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나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지 않는 것은 먹을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고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께서 깨끗게 한 것을 네가 속되다고 하면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직후에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을 접하게 되었고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는 성령이 고넬료를 비롯한 이방인들에게 임하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된다(행10:45-46). 이 사건은 이방인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면 왜 이 사건이 계시될 필요가 있었고, 또한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것을 왜 길게 보도하고 있을까? 그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너무나 파격적인 일이었고,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에 기인한 것으로 특별히 오랫동안 선민사상에 젖어 있었던 유대인들로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바로 이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에 기인한 파격적인 은총의 사건을 기술하고 있다.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결단에 따라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롬9:12).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고 해서 아무도 그분의 주권에 대해 왈가왈부할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토기장이의 주권에 전적으로 속하기 때문이다(롬9:20-21). 그런데 그 하나님께서 구분의 주권으로 이방인들을 사랑하기로 작정했다고 해서 누가 감히 하나님을 힐문할 수 있겠는가? 바울에 의하면 이제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육신의 아브라함의 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믿음으로 태어나는 약속의 자녀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되었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롬9:6-8).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롬9:24-25).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아닌 자를 자기 백성으로 부르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백성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되는데 육신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약속에 의해서 생겨나는 새로운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충격적인 일이지만 그러나 바로 이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이 하나님의 주권적 결단에 의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이다.

그러면 이 충격적이고 놀라운 일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 내용은 바울에 의하면 하나님에 의해 일어난 은총의 사건인데,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의로 여기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까지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그릇으로 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이 로마서 9장 뒷부분과 로마서 10장에 걸쳐서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의요”(롬9:30).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지 아니하리라”(롬9:3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10:4).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롬10:6).

바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는 길은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이룩된 놀라운 구원의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롬10:11-12).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롬10:13).

그러므로 로마서 9장-10장은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이중예정을 전하기 위한 본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본문이다.

이 본문은 운명론적이고 기계론전인 예정론을 뒷받침하는 본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결단을 호소하는 본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이 된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은총의 총화를 전하는 본문이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르트의 예정론은 전통적인 칼빈주의의 이중예정론보다 바울의 정신에 더 깊이 접맥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이다.

예정론은 복음의 총화이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지옥에 갈 사람의 명단을 작성하고 계셨던 것이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를 살리기 위한 위대한 역사를 예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작성된 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주권적 자비를 의미하는 역사였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건지는 위대한 역사를 영원 전에 이미 예정하고 계셨다. 

영원 전에 일어났던 이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의 죄를 담당하시고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즉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므로 예정론의 핵심은 복음이고, 복음의 총화가 예정론이다.

즉 예정론은 하나님이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1:4-5)라는 복음 중의 복음을 전하려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속죄함을 주시고(엡1:7),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고 영원한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엡1:9)을 설명하는 교리이다.12)

(3) 예정론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이다.

예정론에 대한 매우 잘못된 이해는 예정론이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정론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해치기 위한 교리가 아니다. 예정론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려는 데 핵심이 있는 교리다.

에베소서 1장 1절이 언급하는 그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정을 입었다. 이 예정은 “구원의 복음을 듣고”(엡1:13) “믿는”(엡1:13) 인간의 행의를 통해 구현된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예정이 구현되는 것은 운명론적으로 기계적으로 일어나는가?

그렇지 않다. 전통적 예정론은 이 과정을 거의 운명적으로, 기계적으로 설명했는데, 바로 그곳에 근본적인 잘못이 있었다. 우리는 이 예정이 어떻게 구현되는가를 알기 위해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

어떤 초라한 시골에 한 처녀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덕망있고 용모가 수려해서 백성의 존경을 받는 그 나라의 왕자가 이 처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 처녀를 사랑한 왕자는 임금님과 의논해서 이 처녀를 아내로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어느 날 왕자는 이 초라한 시골로 그 처녀를 찾아가서 사랑을 고백하고 왕궁으로 갈 것을 청했다. 이 때 처녀는 어떠한 반응을 할 수 있겠는가? 이 왕자의 청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왕궁으로 따라가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자의 청을 거절하고 왕자에게 무안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절당한 왕자는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격과 덕망이 높은 분이기 때문에 처녀를 기다리며 계속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한다. 그런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마침내 처녀는 왕자의 사랑에 감동하고 그의 인격과 수려한 용모에 사로잡혀 왕자를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왕자의 아내가 되었다. 

그러면 이 처녀가 왕자비가 된 것은 무엇 때문이가? 처녀가 어느날 결정을 잘했기 때문인가? 그렇지 않다. 이 처녀에 대한 선행하는 왕자의 사랑과 왕궁에서 작정된 결정 때문이다.

예정론은 바로 이처럼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을 전하려는 교리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어느 날 우리가 결정을 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고, 찾아오고, 부르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부르심을 언급하고자 하는 것이 예정론이다.

(4)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반대하는 교리이다.

몰트만(Moltmann)에 의하면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반대하는 교리이다.13) 예정론은 우리의 신앙이 기계적으로 얻어지는 것 같은 기계론적인 관점에서 언급되면 절대로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그 근원에서부터 파괴하는 심각한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예정론은 우리가 우리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신앙을 갖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결코 우연한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님을 밝히는 교리이다. 즉 선행하는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 때문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뜨거운 은총의 부르심 때문에 결국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되었다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을 전하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우리의 신앙이 우연에 의한 것이거나 원래 우리 안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안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는 교리이다. 그러나 이 하나님 안에 근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예정은 결코 기계론적으로 발생하는 어떤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란 하나님의 사랑의 불가항력성을 의미하는 것이지 기계적인 수수작용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앞서 언급한 비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불가항력적 은혜란 왕자의 사랑의 깊이의 불가항력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왕자의 사랑이 너무나 지극하고 깊기 때문에, 이 사랑이 너무나 불가항력적이기 때문에 마침내 그 처녀는 그 사랑에 감동되어 자신의 자유의지로 왕자의 아내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한 예정론은 신앙의 무상성을 반대하는 교리이다. 전통적 예정론에서 강하게 강조되는 성도의 견인이라는 개념도 결코 기계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의 사랑의 변치 않음을 표현하는 교리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예정론은 신앙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반대하는 교리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을 표현하는 교리이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잇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니라”(롬8:28-39).

예정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에 대한 고백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무상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예정론은 우리에게 어떠한 위급한 상황이 닥친다 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랑이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이라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표현하는 교리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에 대한 표현이 전통적 예정론에서 기계론적 경향을 많이 나타낸 것이 잘못이었다.

(5) 예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전하려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전하려는 교리이다. 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바울은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이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28-30).

예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 대한 신학적 찬양이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교리는 장로교회가 가지고 있는 대단히 위대한 교리 중의 하나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알지 못하는 신앙은 허약해지기 쉽고 넘어지기 쉽다. 성경의 창세기는 요셉의 고난에 대해 대단히 길게 다루고 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아 애굽으로 팔려가고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감옥으로 끌려간다. 요셉을 감옥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기약할 길 없는 세월을 보내게 된다. 왜 이런 고난이 요셉에게 일어났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창세기 45장에 기록되어 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45:5-8).

예정론은 요셉의 삶 속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하나님의 깊고 깊은 선한 섭리를 표현하려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하나님이 요셉의 형들과 보디발의 아내의 악한 마음까지도 사용하고 있다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고백이다. 예정론은 삼라만상과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백이다. 예정론은 사건의 우연성에 대한 믿음을 반대한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마10:29).

예정론은 하나님의 선하신 돌보심에 대한 신앙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건 속에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하고 이 섭리는 궁극적으로 선을 이룬다는 신앙을 표현하는 교리이다.

📍결언

우리의 신앙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신앙이 우연히 어느 날 결정을 잘했기 때문이라고 믿는 사람은 신앙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다.

전통적 예정론이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의 선택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 것은 매우 잘한 것이다. 그러나 전통적 예정론은 하나님의 예정을 기계론적인 경향으로 언급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 심각한 갈등상황을 야기시켰고 복음전파의 진지함을 파괴시킬 여지를 남겨 놓게 되었다.

또한 전통적 예정론은 그 신학적 기초를 어두컴컴하게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영원 전의 결의에 둠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지와 충돌되는 간과할 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와 같은 전통적 예정론의 오류는 바르트와 몰트만으로 이어지는 20C의 위대한 개혁교회의 신학자들에 의해 크게 수정되어 매우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예정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예정론은 기계론적인 어떤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총을 표현하는 교리이고 신앙의 우연성과 무상성을 반대하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과 변치 않음을 나타내는 교리이다.

예정론은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어떤 교리가 아니다. 예정론은 신앙의 깊이와 무게를 더하는 교리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과 계획과 경륜을 그 중심에 담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표현하는 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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