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April 1, 2016

부활은 승리이다!

부활은 승리이다
고전 15:50-58

고린도전서 15
50.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인류의 최대의 관심사(關心事)이었고, 인간 이성(理性)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원한 숙제이기도 합니다.

많은 종교들이 자기 나름대로 부활 신앙을 가졌지만, 기독교의 부활 신앙처럼 역사적(歷史的)이고, 객관적(客觀的)인 사실 위에 세워진 종교는 없었습니다. 부활 신앙은 세월과 함께 점점 더 널리 펴져 나가고 있으니, 이 하나만 보아도 부활은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었음을 스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미 지적했듯이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7-19)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하나의 믿음입니다. 믿음은 설득으로 되어지는 것도 아니고, 믿음은 지식으로 설명되지도 않고, 다만 자기 스스로의 결단입니다.

남이 무어라 해도, 내게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받아 드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substance)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evidence)'라고 하였습니다.

실상(實相)이란 무슨 뜻입니까? 실상은 허상(虛想)의 반대 개념입니다. 부활은 결코 사람들 마음속에 <허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 위에 나타난 실상이요 실제적 사실에 대한 증거(證據)란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실제적 증거가 무엇입니까?

1. 부활은 죽음(死亡)에 대한 정면 도전이요 승리(勝利)입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폭군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히브리서 2:15절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 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무서워하는 죽음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 승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었습니다.

사망이라는 폭군의 도전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5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부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죽음은 아무런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망의 쏘는 것은 죄라고 했는데, 이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값을 지불하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사망의 지배하에서 해방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죄의 노예 생활로부터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부활은 거짓(虛僞)과 불의(不義)와 죄(罪)에 대한 승리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을 앞세워 거짓과 불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모두 거짓됨으로 오염된 세상이 되었습니다. 누가 누굴 탓할 수 없도록 모두 거짓으로 물들여 졌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10-12절에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죄의 세력 앞에,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기 마음속에 있는 선과 악의 갈등에서 그는 언제나 악의 세력에 굴복하며 너무나 무능하게 산다고 고백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 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였습니다.(롬7:24)

어찌 이것이 바울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무리 '주님뜻 대로 살기로 했네, 주님뜻 대로 살기로 했네' 라고 찬송을 힘차게 불러도 정말로 주님뜻 대로 살았는가? 항상 반문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 죄책감에서 해방 될 수 있는 길은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은 후에 어디에 가서 그 죄 사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죄는 또 다른 죄를 낳게 하고, 죄를 음페하기 위하여 불의를 행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했던 자들의 행위였습니다.

인류 역사는 이러한 거짓과 불의의 죄의 세력들이 도리어 참(眞)을 윽박지르고 의(義)를 매장시키려는 세력으로 등장하여 역사를 지배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이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는 선언을 얻게 되었습니다. 옛 사람, 죄의 지배하에 있던 옛 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되게 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종으로 사는 동안, 우리의 영혼은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로 부터의 해방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부활에서 찾게 됩니다.
주님의 부활은 죄의 세력을 부수고 살아나신 승리이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은 미움과 증오(憎惡)의 갈등을 이긴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무리들, 저들은 승리자 인줄 알았을 것입니다. 제사장과 장로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저들은 자신들이 승리한줄 알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을는지도 모릅니다. 백성을 미혹케하던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자부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은 이 모든 증오와 미움의 갈등을 승리하였습니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 하시었던 주님의 말씀처럼, 주님의 부활은 총검의 증오를 사랑으로 승리한 것입니다.

부활은 승리입니다. 미움과 증오에 대한 사랑의 승리입니다. 원수가 없는, 원수를 모르는 사랑! 이 사랑 앞에, 모든 증오와 미움과 갈등은 살아졌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으면서까지 원수를 위하여 용서를 빌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당해 낼 자가 없었습니다.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주님의 가르침, 그 사랑 앞에 로마제국의 총검도 녹아 버렸습니다.

이 사랑의 힘으로, 젊은 집사 스데반이 돌로 몰매를 맞으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그 포악한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하늘 보좌 위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놀라운 사랑의 근원이신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게 상처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아마도 깊이 상처를 준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별명이 '용서받은 죄인'이지만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함들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때론 용서하기 힘드니 그냥 잊고 사는 것같아요...값없이 용서를 받았서니 조건없이 용서해야겠죠...쉽지는 않지만 포기하진 말아요...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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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상처 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대답: 인생의 한 시점에 있어서 다른 사람의 오해를 사거나 상처를 받거나 피해를 받은 경험은 누구나 있습니다. 우리는 크시스쳔으로서 이런 일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성경에 따르면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고 합니다. 에베소서 4:32은 말하길,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또 골로새서 3:13은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요점은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나도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 용서해야 합니까? 다름아닌 내가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슬픔과 회개에 휩싸인 사람이 내게 용서를 구할 때 용서하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내게 죄 지은 사람까지도 조건 없이 용서하라고 합니다. 진실된 용서가 우러나지 않는 것은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분노를 표시하는 데 이 어느 것도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기도문을 보면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구합니다 (마태복음 6:12). 예수님은 마태복음 6:14-15에서 말하길,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의 용서를 말하는 성경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의 용서를 진실로 경험해 보지 못했음을 반증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 중에 어떤 한 가지를 순종하고 있지 않아도 우리는 하나님께 죄짓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에게 잘못 행할 때 마다 우리는 그들에게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도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자들의 허물을 용서하신 하나님의 광대한 긍휼을 잘 들여다 보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아낄 만한 권리가 없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자도 자신에게 지을 수 있는 죄 보다 더 큰 죄를 하나님께 지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만한 큰 용서를 우리에게 베푸셨는데 어찌 우리가 더 작은 용서도 서로에게 베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18:23-35에 있는 예수님의 비유는 이 사실을 아주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7
"23.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에 비길 수 있다.
24.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몸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26. 그랬더니, 그 종이 엎드려서 무릎을 꿇어 애원하기를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였다.
27.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 그를 놓아 주고, 빚을 삭쳐 주었다.
28.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
29.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기를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였다.
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31.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32. 그러자 주인은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간청하기에, 내가 네게 그 빚을 다 삭쳐 주었다.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34.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리에게 넘겨 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35.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형제나 자매를 용서하여 주지 않으면, 내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표준 새번역)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용서를 구할 때 거침없이 용서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한일서 1:9).

요한일서 1:9.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셔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표준 새번역)

우리가 베푸는 용서는 하나님이 하신 용서가 무한하신 것과 같이 경계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7:3-4).

누가복음 17
"3.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라. 다른 제자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 주어라.
4. 그가 네게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서 회개한다고 하면, 너는 용서해 주어야 한다." (표준 새번역)

(gotquestions.org)

영원한 만족 / 존 파이프

영원한 만족
/ 존 파이퍼 목사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35)

이 본문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의 예수님되시는 모든 면을 먹고 마시는 것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우리 영혼의 목마름은 예수님으로 만족되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목마르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야말로 만족을 추구하는 우리의 갈망을 끝내는 분이십니다.

사도 요한이 말하는 그러한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신뢰할 때, 예수님의 임재와 약속이 너무나 만족스러워서 우리는 죄의 쾌락의 유혹에 지배당하지 않게 됩니다(로마서 6:14 참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에 대한 믿음은 죄의 능력을 무력하게 하며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14도 같은 것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고 요한복음 6:35에 따르면, 구원하는 믿음은 영혼의 가장 깊은 갈망을 만족시키는 물을 마시는 것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37-38도 같은 것을 말씀해 줍니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 안의 마르지 않는 생명의 샘이 되십니다. 이 생명의 샘은 영원히 지속하며 우리를 천국으로 이끕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영을 보내주셔서 이를 이루십니다(요한복음 7:38-39).

(견고한 기쁨에서...)

교회 리더의 핵심 조건

*교회 리더의 7 가지 핵심 조건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교회 내에서 리더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교회 내에서는 물론 외부에서도 여전히 리더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리더가 된다는 것은 그의 삶 전체가 변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믿는 성도라면 언제 어디서나 그리스도인답게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리더와 그리스도인 리더는 무엇이 어떻게 다를까요? 과연 그리스도인 리더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달라스 신학대학원의 목회학 교수이자 목회 상담과 지도자 훈련을 전담하는 맬퍼스 그룹의 총재인 오브리 맬퍼스는 그의 저서 “리더가 된다는 것은”에서 그리스도인 리더가 갖는 특징에 대해 다음의 8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인 리더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리스도인 리더는 주님을 영접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의 핵심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 리더와 리더십의 출발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신의 종교란에 유대교나 회교, 불교가 아니라 기독교라고 체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그리스도인 리더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합니다. 비극은 오늘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한 그리스도인 리더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2. 그리스도인 리더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헌신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 리더는 그리스도인이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합니다. 별도의 단계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후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주권에 순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예수님께 맡기겠다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물론 주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헌신해야 합니다. 하지만 리더는 그들에게 헌신의 본을 보이는 사람임을 잊지 마십시오.

3. 그리스도인 리더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삼는다.

그리스도인 리더의 세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삼는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인 리더는 리더십에 관한 기본 지식을 성경에서 배워야 합니다. 즉 성경은 그리스도인 리더가 모든 정보와 지식을 거르는 여과기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에 기반한 말씀이기 때문에 성경에서 말하는 리더십이야말로 참된 리더십입니다.
물론 일반계시 속에서도 리더십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가 담겨 있기 때문에 이 진리를 캐내기 위해 그리스도인 리더는 리더십에 관한 조사 자료와 다양한 이론을 연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진리는 하나님의 진리임에 틀림 없습니다. 책이나 학자들이 주장하는 리더십 이론 전부가 하나님의 진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무엇이 하나님의 진리이고 무엇이 아닌지를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며, 그 기준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4. 그리스도인 리더는 성숙한 인격자이다.

그리스도인 리더의 네 번째 특징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성숙한 인격자라는 점입니다. 하워드 헨드릭스는 “오늘날 이 세계의 가장 큰 위기는 리더십의 위기이다. 그리고 리더십의 가장 큰 위기는 인격의 위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리더십의 열쇠는 리더의 성품입니다. 훌륭한 인격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는 필수조건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이 보편적으로 갖추어야 할 성품뿐만 아니라 리더의 성품에 대해서도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학자들은 디모데전서 3장 2~4절과 디도서 1장 6~7절이 리더의 덕망을 강조할 뿐 아니라 그 뒤에 설명하는 모든 도덕적 성품을 보여주는 집약적 표현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초대교회 리더뿐 아니라 오늘날 21세기 교회의 지도자들을 향해서도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리스도인 리더는 올바른 동기에서 일한다.

리더의 성품은 그가 하는 일, 즉 행동을 결정짓는 반면 동기는 그가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바울에게 최우선적 동기는 복음전파였습니다. 가는 곳마다 바울은 복음 전파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두 번째 동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하느냐보다는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느냐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다음으로 바울이 지녔던 동기는 사람들이 원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을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리더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동기는 개인의 유익이 아니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6. 그리스도인 리더는 성령의 능력으로 섬긴다.

세상의 리더들은 무엇이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행하고 이끕니다. 한마디로 그것은 육신의 능력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 세상에서 훌륭한 일을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도 얼마든지 육신의 능력으로 일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선택의 여지없이 인간적 능력으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부터 성령이 그의 속에 거하시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7. 그리스도인 리더는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한다.

마태복음 20장 26~28절과 요한복음 13장 1~17절의 말씀을 종합해 볼 때, 종으로 섬기는 리더십이란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겸손히 섬긴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리더십을 발휘하는 마음가짐은 겸손이라는 말이 잘 대변해 줍니다. 섬김은 리더십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겨야 하며 그 동기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의 교회 부설, 국제제자훈련원에서  발췌...)

성숙한 신앙인은 무엇이 다를까?

*성숙한 신앙인은 무엇이 다를까?

히브리서 5장 14절을 보시면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할 줄 알되, 어린아이들은 잘 속습니다. 아직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숙하지 못한 신앙인들은 이단이나 사이비의 표적이 됩니다. 속지 않기 위해서는 빨리 성숙한 신앙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분별력이 있는 신앙입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으나, 무엇이든지 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교회에 덕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생각하면서 말도 하고, 표현도 하게 될 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워지는 이유는 아직 미숙한 모습의 그리스도인이 많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생명이 있는 것은 반드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앙은 생명이 있는 신앙입니다. 뿌려진 씨앗은 자라야 합니다. 만일 세월이 지났는데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몇 가지 점검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첫째로는 아직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닐지 모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회 멤버가 모두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심각한 얘기입니다.

둘째로는 병들었을지도 모릅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영적인 깊은 병이 들어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신앙인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에 걱정거리가 될 것입니다.

셋째로는 영양섭취를 못했거나, 생장점이 잘라져서 죽은 경우입니다. 처음에는 생명으로 시작했으나 마지막은 죽음으로 가는 경우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익숙합니다. 그러나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교회생활에 익숙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에 이익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에 해를 끼치는 사람은 초신자가 아니라, 교회에 익숙하지만 아직 신앙적으로 자라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교회에 오래 출석해서 직분은 받았지만 인격과 신앙이 성숙하지 못해서 분란을 일으키며 주위의 교우들을 시힘들게 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예수님으로 시작해서 삶의 과정 과정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생각하면서 살 다가 마지막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님 품에 안기는 진짜 신앙인이 많아질 때 교회는 더 큰 희망 속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게 되지 않겠습니까?

장경덕 목사 (교회와 신앙에서...)

💜마음을 다스리는 참된 산앙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이 바로 마음을 마귀로부터 지키고 잘 다스리는 일입니다.

'내 마음을 나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마음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쉽게 분노하고 좌절하며 실족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빈번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참된 신앙'이라는 좋은  글이 있어서 올려드립니다. 마음을 잘 지키고 가꾸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 샬롬.

🌻🌻🌻🌻🌻

🎯미음을 다스리는 참된 신앙

신앙을 말씀을 매일의 삶에서 적용하는 실천이라는 관점에서 한마디로 정의하면 '마음을 다스리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 16:32에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4:23에는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이란 이가 빠져버린 입처럼 무능하게 됩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교회나 직장에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신앙의 열매를 맺기가 어렵습니다. 더욱이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마음의 평안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에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이 길다는 것, 교회에 오래 다녔다는 것 혹은 어떤 직분을 받았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잘 다스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을 입증합니다. 참되게 신앙 생활을 잘 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하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느냐, 없느냐로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주안에서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많은 갈등과 시험과 문제가 생기는 경우를 흔히 보게됩니다.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마음이 맞지 않아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경우도 적지 않게 있습니다. 작은 일에 참지 못하고 화를 내며 혈기를 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아집에 사로잡혀 남을 이해하거나 용납하지 못하는 좁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흔히 보게 됩니다.

중요한 문제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친교의 관계가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마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교회 안에 참된 영적인 부흥이 일어나며, 사랑의 교제가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교회에 속한 교인들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이유로 교회에 갈등과 문제를 일으키고 급기야는 교회에 큰 어려움을 주거나 분열에 도화선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서는 안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이런 일을 되풀이해서도 안됩니다. 우리는 주님이 원하시는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교회를 이루어나가야 하고, 세상에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교회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마음을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잘 다스려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생각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을 넓게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생각을 깊고, 밝게 해야합니다. 나의 소욕을 생각하기 전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말씀)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충돌할 때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순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을 넓고 깊게 그리고 밝게 말씀으로 잘 관리하여 우리의 마음을 잘 다스릴 때 우리의 가정과 교회와 직장이 밝아지고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될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기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은 마음을 잘 다스리는 사람에게서 찾아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잘 다스리는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만나고 매일 그와 동행하는 인격적인 관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아도 진정한 주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으면 자신의 만족과 필요를 채우는 종교생활로 그치게 됩니다.

기도와 찬양 그리고 깊이있는 말씀 묵상과 적용으로 매일 무장하는 사람만이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릴 수 있습니다.

생각을 넓게 여십시오. 생각을 깊게 하십시오. 생각을 밝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여 마음을 잘 다스리십시오. 그리고 넓고, 깊고, 밝은 예수님의 마음에 스스로를 비추고 닮아 가십시오.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품고, 세상을 품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럴 때에 우리들이 주님께서 원하신 참 시랑을 품고 기쁨으로 섬기는 믿음의 사람이 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언 4:23)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6:32)

(어느 신앙 칼럼에서 펌...)

인간의 선택인가, 하나님의 선택인가?>

‘칼빈 vs 아르미니우스’냐, ‘칼빈 & 아르미니우스’냐?

[서평] 랜디 알콘의 <인간의 선택인가, 하나님의 선택인가?>

랜디 알콘 | 토기장이 | 368쪽 | 14,000원

비록 인간의 자유가 늘 제한적이라 할지라도, 인류는 그 제한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함으로써 그 자유를 최대한 확장하고 또한 누리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다. 인간은 교육과 연구와 법률과 제도를 통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미지에서 응용으로, 침범에서 공존으로 나아감으로써 자유를 더욱 성취하고 향유한다.

그러나 신학적 담론에서 이 문제는 필연적 한계에 직면한다. 바로 절대자의 설계다. 영화 '매트릭스'의 한 장면이 연상되지 않는가?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지만, 자신의 운명에 대해, 특히 내세 혹은 영원을 믿는 기독교 신앙에서 절대적인 설계가 있다는 교리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에 허무를 가져다 준다. 이러한 고전적 신학 논쟁, 즉 예정론 논쟁은 오랜 것이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 기독교 내에서 이를 최대한 설명하고 정리한, 대표적인 두 가지 해석이 있다. 바로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다. 국내에서 요한 칼빈은 종교개혁자로,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는 이단처럼 알려져 있다. 국내에 아르미니우스에 대한 출판물은 성지원이란 곳에서 나온 「아르미니우스 신학」 외에는 없다. 그렇지만 아르미니우스의 예정론은 신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를 다루는 가장 중요한 설명 중 하나다.

랜디 알콘은, 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를 놀랍게도 쉽게 풀어냈다. 「인간의 선택인가, 하나님의 선택인가?(원제 hand in HAND)」는 지금까지 읽어 본 예정론 논쟁 책들 중 가장 담백하면서도 각 진영의 주장을 공정하게, 그리고 심플하게 다룬다(책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도표들을 그냥 넘어가지 말고, 반드시 신중하게 다 읽어보길 바란다!). 아니, 오히려 그의 프로젝트는 두 해설의 화해이다.

저자에 의하면 성경은 어떤 곳에서는 인간의 선택이 자신의 영원을 결정한다고, 또 다른 곳에서는 신의 주권이 인간의 영원을 행위와 상관없이 이미 결정했다고 말한다. 한편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도 신의 주권을 말하고, 칼빈주의도 인간의 선택을 말한다. 즉 본래 성경이나 신학은 둘 중 하나만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 성도 대부분도 일관성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진 않는다.

칼빈주의는 흔히 튤립(T.U.L.I.P) 교리를 고수하는 자들로 인식되지만, 사실 그 중 'L(limited atonement)', 즉 제한 속죄를 뺀 4대 교리를 믿는 칼빈주의자도 많다. 랜디 알콘은 칼빈주의 내에서도, 아르미니우스주의 내에서도 몇 가지 의견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일반적으로 양 극단에 하이퍼 칼빈주의와 열린 신론(open theism)이 있다(토기장이 출판사는 이를 개방적 유신론이라고 번역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칼빈주의와 아르미니우스주의에는 양립론·몰리니즘·자유의지론 이렇게 셋이 존재한다.

저자는 우선 서로에 대한, 칼빈주의는 인간의 선택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신의 주권을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오해를 없애기 위해 각 진영에서 가장 열렬한 신학자들을 끊임없이 인용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자 로저 올슨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칼빈주의 신학자 R. C. 스프로울은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외에도 랜디 알콘 책의 장점은 우리가 의심할 만한 모든 구절을 다루며, 정직하게 학자들의 발언을 인용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미 학술적 서적이 있음도 알려 준다(그가 추천한 책 두 권은 「Four views on Divine Providence」, 「Predestination and Free will」이다).

앞서 설명했듯,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세 견해(양립론, 몰리니즘, 자유의지론)는 대칭 저울, 빗금친 막대, 집합 도표 등을 포함한 그림과 함께 잘 설명된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 자유의 조화를 결국 비율적으로 설명하는데, 이 중 가장 필자가 선호하는 견해가 몰리니즘이다.

이는 마치 바둑에서 고수가 '예지해서' 어딘가에 두면, 하수는 그 계획 안에서 자유롭게 두지만 결국 전체 판은 고수에 따라 흘러가는 것과 같다. 몰리나는 이를 '중간 지식'이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개연성 있는 가상 사실(counter-factual)은 성경 도처에서 발견된다(렘 38:17-18; 겔 3:6-7; 마 12:7, 24:43; 고전 2:8).

양립론은 그분이 악을 허용하기도 하고 통제하기도 하시는 것이며, 자유의지론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악도 허용하신다는 것이다. 랜디 알콘은 이 중 어느 것이라도 그리스도인은 수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단, 열린 신론 혹은 개방적 유신론에 대해 랜디 알콘은 매우 단호하다. 이는 피조물의 선택에 대해 신이 알지 못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랜디 알콘에 의하면, 그것이 얼핏 보기엔 신께 비극에 대한 책임을 돌리지 않는 합리적 이론 같지만, 사실상 모든 일이 신의 뜻 안에서 일어난다는 신학이 오히려 더 비극을 당한 사람에게 위로를 준다.

랜디 알콘은 그래도 신의 주권에 다소 무게를 두면서, 그것을 인간의 존엄성이나 자유에 대한 훼손이라고 보지 않고 오히려 신께 의존할 수 있는 희망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선택이 신의 주권을 좌절시키지 못함은, 억압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다.

물론 여기에 전적으로 동의하기 힘들다. <악의 역사(전 4권)>를 쓴 제프리 버튼 러셀은 "아무리 악을 선으로 바꾸는 능력이 신에게 있다 할지라도, 전쟁에서 아무 죄 없는 어린아이의 얼굴에 네이팜탄이 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이며, 신에 대한 신뢰, 역사 속 인간의 책임, 비극을 겪는 모두를 위한 위로라는 이 셋의 역동적 관계 속에서 어느 것이 정답이라 잘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랜디 알콘이 버린 '열린 신관'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저자의 실천적 제안은 간단하다. 칼빈주의나 아르미니우스주의 모두 서로의 장단점을 인정하되, 오해를 없애고 진지하게 서로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랜디 알콘의 자서전적 고백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한다. 평신도뿐 아니라 상호 입장에 대해 공격적이기만 한 모든 목회자와 신학생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

"나는 과거 아르미니안주의자였던 시절에도 내가 그리스도를 선택한 공로로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 이제 칼빈주의자가 되었지만 사람들이 로봇에 불과하다거나 하나님이 인류의 대부분에게 무관심하신 분이라고 믿은 적은 한 순간도 없다."

/진규선 목사
서평가,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