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일(직업)
/ 이원구
1. 창조 목적과 문화 명령
1). 요한계시록 4:11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온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언합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You are worthy, our Lord and God, to receive glory and honor and power, for you created all things, and by your will they were created and have their being."
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3). 창세기 1:26-28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잘 알려줍니다. 특별히 창세기 1:28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order)'으로 부릅니다.
문화 명령은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이후에도, 무효화되거나 변경되지 아니하고,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 맺은 언약(covenant)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칼빈은 이 문화 명령을 기독교 강요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요청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는 대명령'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and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4). 개혁주의 신앙은 모든 문화의 근원은 바로 창조주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문화 명령을 완수해야 할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고 그의 나라가 성취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생각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순복하며(고후 10:5), 모든 말과 일을 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의지하여 감사하라(골3:17)'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And whatever you do, whether in word or deed, do it all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결국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는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구분없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소명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1). 소명(召命, 부를 소 / 목숨 명)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칭의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이 첫 번째 '소명(call, calling)'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재능을 주시고, 이를 사용하여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소명(vocation, profession, occupation)'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일로 부르시는 두 번째 소명의 의미에 대해서 나눕니다.
2). 벧전 2:9에서 개역개정의 '왕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을,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왕의 제사장'과 '왕가의 제사장'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성도는 대제사장이시며 만물의 왕이신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삼중직분 - 대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속한 이 세상의 제사장임을 고려하면, '왕의' 혹은 '왕에 속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9에서, 우리를 택함을 받은 민족, 왕의 제사장들, 거룩한 국민,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그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
이것은 우리를 세상의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소명과 관련하여 특별히 '왕의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혁주의는 흔히 이것을 '만인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 萬人祭司長)'이라고 부릅니다.
만인제사장설을 소명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성도의 삶을 성(거룩한 것 곧 교회나 이와 관련된 곳)과 속(거룩하지 않는 곳 곧 교회 밖/일반 세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왕의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 의지를 최대한 드려서, 교회와 세상을 향해서 동일한 자세로, 주님의 뜻을 실현하여 하나님의 문화 명령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3). 중세 카톨릭 교회는 교회 안의 섬김과 교회 밖의 일을 완전히 구분하여, 성도의 삶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분리했습니다. 이것을 '성속(聖俗) 이원론 혹은 성속 분리주의(Dualism)'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카톨릭 교회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를 사해주는 사제(고해성사)와 같은, '인간 중보자(a human mediator)'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이러한 성속의 분리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성과 속의 구분없이 통합적(총체적)이고, 따라서 한 신자의 모든 생각과 행동 양식이 교회 안과 밖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4). 사도 바울의 권면
🎯고린도전서 10:31-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31)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Do not cause anyone to stumble, whether Jews, Greeks or the church of God - (32)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 even as I try to please everybody in every way. For I am not seeking my own good but the good of many, so that they may be saved.(3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말며,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쳐 구원에 이르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 안과 밖에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사는 것이기에,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장소와 때에 따라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동일한 믿음으로 교회와 세상을 섬깁니다. 물론 섬김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기독교적 세계관 곧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문화 명령의 이행이라는 가치관으로, 일관되게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3. 일에 대한 오해와 종교 개혁자들의 소명에 대한 입장
1). 일반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일을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신 고통스러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타락전에 에덴 동산의 관리인으로 임명하셨고(창2:15), 또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땅을 다스리며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1:26-28).
결국 아담은 타락전에 이미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창세기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work it and take care of it."
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서도, 6일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하고(9절),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절).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를 위해 6일 동안 일하셨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11절).
🎯출애굽기 20:9-11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Six days you shall labor and do all your work,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to the LORD your God. On it you shall not do any work, neither you, nor your son or daughter, nor your manservant or maidservant, nor your animals, nor the alien within your gates.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For in six days the LORD made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but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Therefore the LORD blessed the Sabbath day and made it holy.
3). 성도의 직업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라는, '직업 소명론(vocational calling)'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종교 개혁가는 마틴 루터였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콘체(W. Conze)는 루터의 직업 소명론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루터는 기독교적 일과 직업 개념에서 '재화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가르친다. 소비 지출과 자기 복락을 위해서만 노력하며 사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루터 역시 이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거기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루터가 말한 기독교적 일의 개념은 자기 마음이 돈과 재화에만 의지하며 만족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현대 경제사회에서는 전혀 받아들 일 수없는 것을 루터는 가르친다.
루터에게는 일과 직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장이다." (출처: 루터의 직업 소명론, 최주훈 목사, 루터교)
그렇다고 루터가 세상의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세상 직업을 거룩한 소명이며 성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다. 콘체가 인용했던 것처럼, ‘자신의 일이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고 섬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이웃사랑과 직결된다는 것을 항시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자 자기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일이, 곧 세상을 예배로 가득 채우는 길’로 가르쳤습니다 (루터의 탁상담화).
이러한 루터의 가르침은 구약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던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마 22:37-40)과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도 바울의 권면(고전 10:31-33)과도 일치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4). 루터를 이어서 종교개혁을 실천했던 칼빈은, 당시 카톨릭 교회가 노동을 신앙생활과는 무관한 세속적 의무로 규정했던 것에 반대하여, 모든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노동과 직업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노동을 영적 구원처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일의 거룩성을 인정하고 옹호했습니다.
실제로 칼빈은 그 당시 카톨릭 교회로부터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핍박을 받고 제네바로 도망왔던 피난민들을 위해, 방직 공장을 지어서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여 일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성도들이 실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칼빈은 마태복음 25장 24절(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주석에서 "인간사회에 유익을 끼치며 사는 삶의 방식보다, 더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은 없다"고 말하며, 사회에 대한 봉사를 곧 하나님의 봉사로 이해함으로써, 카톨릭 교회의 성속 분리의 이분법적 직업관을 혁신적으로 타파했습니다.
결국 칼빈은 '모든 일(직업)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가치를 가지며,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여 경계를 넘지 않아야 하고, 맡겨진 소명에 충실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이 교회의 섬김과 같이 소중하다'고 밝히면서, '성도의 일(직업)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3권 10장)
5). 이러한 소명(직업, 일)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주의의 해석은, 시민 계급의 대두와 함께 카톨릭 교회의 성속 이원론을 깨고, 유럽 사회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현대 그리스도인의 제사장 역할의 위기
1). 종교개혁 이후에 약 500 년이 지난 지금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직업)을 통해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제사장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 중에 세상에서 대충 일하고, 주일에 열심히 교회의 사역을 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실제 삶의 자리에서 아무런 영향력 혹은 유익을 미치지 못하게 되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고, 오히려 복음을 약화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2). 또다른 분류의 성도들은 주 중의 일터를 오직 선교의 현장으로만 생각하고 일 자체를 소흘히 하여, 직장 생활이나 비지니스에서 실패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소명(직업)의 현장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최선의 결과를 내며, 이를 통하여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개척 초기의 청교도 목사였던 토마스 쉐퍼드(Thomas Shepherd)는 소명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늘의 직장(교회)에서 영적인 일을 하게 하실 때 세속적인 생각을 키우는 것이 죄이듯, 하나님께서 이 땅의 직장에서 일하게 하실 때 영적인 생각에 시달려 주의를 빼앗기는 것 또한 어떤 면에서는 커다란 죄이다." (출처: Worldly Saints, Ryken)
3). 우리가 일에 몰두 할 때에, 하나님을 잊고 있다거나 그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따라서 성도가 일에 전념하지 않거나, 허락하신 영역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그의 소명을 이루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사이며 기독교 저자인 오스 기니스박사는 '당신을 향한 소명'에서,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또한 같은 책에서, "우리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재 목적의 가장 고상한 근원이다. 그러한 소명을 떠나서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자 하는 모든 희망은 결국 절망으로 귀결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4). 반면에 세상의 일(직업)이 삶의 목적이 되어 불신자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직업의 선택이나 일의 과정 모두가 사람을 섬기거나 사회에 봉사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개인적인 성취나 이익의 극대화만을 따라가며, 일터에서 주님께서 당부하신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장인 혹은 비지니스 맨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 그리스도인 직장인 혹은 비지니스 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일이 목적이 된 삶과 일이 소명이 된 삶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일을 통해 이웃을 섬기며 우리의 존재 목적 곧 소명을 구현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5.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그리스도인의 책임
1).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터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지 못한다거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면에 하루 24시간 교회나 관련된 곳에서 신앙적인 일을 해야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또한 버려야 합니다.
예를들면 오페라 가수로 수년간 음악교육을 받고 전문 오페라단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 성악가는,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준비해서 주어진 배역의 노래를 잘 불러서 청중들에게 가장 좋은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휘하여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일에 성가대에서 성가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과 동일하게 중요하며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왜냐하면 이 오페라 가수에게는 공연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소명으로 부르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2). 소명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영광를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주신 재능이나 은사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잘 개발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책임을 무시하고, 단순히 좋아하며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망이라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딤전 5:8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맡겨준 가족과 친지들을 부양하며, 사회의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재능을 사용해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소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지 않으면서 그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거나 동일한 은사를 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목수였고, 베드로는 어부였으며, 바울은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재능)을 주시고 일하게 하시며, 이를 통하여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작업은 귀하고 천한 일이 없습니다. 루터는 '사제가 말씀을 강론(설교)하는 일이나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귀중한 일'이라고, 자신의 여러 글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루터는 우리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영적이며, 참된 제사장이라고 강조합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을 위한 3개의 논문)
우리들 마음 속에 깊이 잠재하고 있는 오류 곧 교회(신앙) 혹은 이와 관련된 일은 거룩한 것이고, 삶의 현장에서 행하는 일은 속되다는, 성속 이원론(혹은 분리론)을 완전히 버려야만,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며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주 중에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것은,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것과, 동일하게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 '만인제사장설'은 성도의 소명에 대한 차별과 서열 혹은 오만이나 특권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29에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slave nor free,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If you belong to Christ, then you are Abrahams seed, and heirs according to the promise."
하지만 만인제사장설이 교회 안에서 전임사역자의 역할이나 리더십 혹은 재량권을 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전임사역자에게만 영적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전임서역자와 일반 성도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비록 다른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 동일한 의무와 책임을 가집니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인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를 구할 때에, 교회의 안과 밖에서 모두 거룩하고 신성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5). 우리의 일 곧 소명은 단순히 생계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방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명의 자리로 부르셨고, 우리 또한 소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어느 직업이든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며 서로를 높이고 섬긴다면, 교회 안과 밖의 소명이 '함께' 거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