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5, 2019

민주적 교회 운영을 둘러싼 8가지 오해

📍민주적 교회 운영을 둘러싼 8가지 오해
/ 박지호 기자 (NEWS M)

백종국 교수와의 '일문일답'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모범 정관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따라붙는 몇 가지 질문이 있다.

이런 질문을 ‘민주적 교회 운영을 둘러싼 8가지 오해’라는 제목으로 엮어봤다.

백종국 교수의 LA 기윤실 건강 교회 포럼 강의 내용, 그의 저서 <바벨론에 사로잡힌 교회>, 백 교수와의 서면 인터뷰를 토대로 일문일답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1. 아무리 제도가 좋아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없다.

제도 개혁은 논외로 하고 인간의 의식만 탓하는 것은, 마치 교통 체계가 엉망인 교차로에서 계속 사고가 일어나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운전자의 빈약한 인식만 탓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간혹 교회의 특정 문제를 비판하면 제도 개혁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제도 개혁을 강조하면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의식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려보자고 말하면서 개혁의 초점을 흐리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합하여 선을 이루는 데 필요하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고가 잦은 교차로에서 ‘긴급 구난’과 ‘제도 개선’과 ‘의식 개혁’은 모두 필요한 수단이다.

2.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가로막는 인간적인 처사다.

한인 교회도 이미 한국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물들어 있기 때문에 '민주적'이란 말은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행사되어야 하는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은 인간적인 처사라는 오해도 더러 있다. 이러한 생각은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물들어 있는 일부 교회 지도자들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교회의 조직과 운영 체제가 민주적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의적으로 개념을 설정했기 때문에 의사소통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고 있는 셈이다.

3. 교회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신본주의다.

먼저 각종 개념의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대체로 개념들은 하나의 쌍을 이루고 있다. 예컨대 신본주의의 반대는 인본주의다.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주의며, 왕정의 반대는 공화정이다.

흔히 교회 정치를 비유할 때 사용하는 신정(theocracy)의 반대는 세속정(polity)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러나 신정(神政)이라는 개념은 역사상으로나 신학적으로 특정한 시대에만 존재했으므로 현 시대에서 비유로만 쓰일 뿐이다. 이러한 개념들을 현재 존재하는 체제들과 비교해보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민주주의        독재주의

신본주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톨릭 교회

인본주의     민주 국가         독재 국가

프로테스탄트 교회, 즉 개신교의 조직과 운영 체제가 민주주의를 원칙으로 한다는 점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다 영적인 계급에 속하며, 이들로 이루어진 교회 안에서는 직무상의 차별 외에 다른 취급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루터(Luther)와 칼빈(Calvin)이 여러 차례 명백하게 강조했다.

신학자이며 정치학자인 니버(Niebuhr)와 템플(Temple)도 이와 같은 입장이며, 한국의 교회 정치 전문가인 박병진 목사나 임택진 목사도 개신교의 교회 정치가 '기본적으로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데에 의견을 함께하고 있다.

물론 일반 국가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교회는 하나님나라의 표상 즉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의 표상이므로 만일 하나님의 계시를 직접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통치를 위임해도 좋다. 그러나 개신교의 입장은 이 직접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종료되었으며, 지금은 오로지 성경을 통해서만 계시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느 교회 지도자가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는 더 이상 개신교의 지도자라고 할 수 없다. 교회의 올바른 운영은 누구나 잘 알 수 있도록 계시된 성경의 말씀과 기준을 따라야 한다. 민주주의 체제는 직접 계시를 대치하는 차선의 체제이다.

4. 교회 정치 체제가 민주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비현실적이며 비성경적이다.

성경은 모든 인간들이 예외 없이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민주주의란 견제와 균형을 원칙으로 삼는 체제이므로 이러한 죄의 본성이 부지불식간에 교회 안에 퍼지는 것을 방지해준다.

니버(Niebuhr)는 이에 대해 “인간은 정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에 민주주의가 가능하고, 불의를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민주주의가 필요하다”고 설파한 바 있으며, 템플(Temple)은 “민주주의는 하나님이 만드신 인간의 본성을 가장 정당하게 다루는 형태의 구조이며, 민주적 원리는 기독교의 산물이다”고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민주적 교회 운영은 성경적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충분하다. 한국 교회가 과거에 목회자 중심의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개 교회 공동체 내에서 목사가 가장 근대적 교육을 많이 받고 대부분의 일에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계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고등 교육의 확산으로 말미암아 회중들의 수준이 매우 높아졌다. 과거처럼 교회의 특정 지도자가 모든 것을 다 관장할 필요도 없거니와 그랬다가는 도리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이다. 정치학 교수가 포함된 회중 앞에서 극단적인 정치적 편견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설교하는 목사를 상상해보기 바란다.

근본적으로 사회가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에 모든 부분에 다 통달한 지도자를 찾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전문적 분업 체제를 확보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하다는 점이다.

5. 개교회 정관과 노회, 총회 법이 충돌하는 경우가 있다. 노회와 총회의 법이 상위법이다.

한국의 교회 정치 전문가인 박윤선 목사나 임택진 목사는 '상회'나 '하회'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종교 개혁으로 세워진 개혁 교회는 치리회의 높고 낮음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회와 노회와 총회를 설치하지만 이들 사이에 등급이 없고, 다만 대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노회나 총회가 당회의 상회가 아닌 것처럼, 교단 헌법도 교회 정관의 상위법이 아니다. 교단 헌법은 공동의 신앙고백과 질서를 위한 일종의 협정문이다. 개 교회의 정관이 이를 상위법으로 인정할 때에만 효력을 가질 수 있다.

실제로도 각 교단의 헌법은 각급 치리회가 헌법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자체의 규정을 제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예장통합 제 63조, 예장고신 제77조, 기장 제 43조). 이 규정의 활용 폭을 각 교단이 어느 정도 인정할 것인지에 따라 교회 정관을 둘러싼 다양성이 결정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교단이냐 그리스도냐를 결정해야 한다면, 개혁적 그리스도인은 후자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교회는 일반 사단법인에 준하는 지위를 갖기 때문에 개별 공동체의 정관은 갈등 국면에서 중요한 사법적 판단 기준이 된다.

매우 혼란스럽고 비민주적인 정관은 교회 내의 갈등을 해결하기는커녕 도리어 촉발시키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따라서 민주적이면서도 잘 정비된 정관, 즉 모범 정관에 가까운 정관의 존재는 장래에 발생할 수 있는 교회의 갈등을 예방하거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에 순리적으로 해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6. 모범 정관을 채택하면 담임목사의 권위가 위축된다.

교회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목사의 권위다. 설교단 위에서 권위 있는 가르침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부흥할 수 없다.

그러나 목사의 권위는 영적일수록 바람직하다. 대체적으로 영적인 권위를 갖춘 목사는 제도적인 권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반대로 영적인 권위가 떨어질수록 그 목사는 제도적인 권위로 보호를 받고 싶어 한다. 영적 권위의 한계는 무한하지만, 제도적 권위의 행사는 매우 제한적이다.

또한 제도적 권위를 추구할수록 그 목사는 성경에서 멀어지게 되어 있다. 역사의 기록을 보면 칼빈(Calvin)의 제네바 통치는 때로 가혹했다. 그러나 칼빈이 어떤 직위를 기반으로 그러한 통치권을 행사했다는 기록은 볼 수 없다. 칼빈은 가르쳤고, 시민들은 복종했다. 한국의 목사들은 칼빈을 본받는 게 바람직하다.

7. 모범 정관이 오랫동안 축척되어온 교회의 전통과 충돌할 수 있다.

개혁이 혹여 개악이 아닌지 자세히 검토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전통의 힘을 들어 개혁을 위한 논의 자체를 방어할 일은 아니다. 개혁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교단 헌법들을 연구해보면 교단 헌법들이 가진 난맥상이 잘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헌법에는 규칙이 가져야 할 요건조차도 미비할뿐더러, 지난 100여 년 세월을 거치면서 개혁주의가 아니라 사제주의를 강화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영국의 보수주의 이론가인 버크(Burke)가 지적한 대로, 문화는 역사의 축적물이므로 무조건 바꾸거나 파괴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으로 좋은 점은 살리고 나쁜 점은 부단히 바꿔나가는 태도가 필요하다.

현재의 체제를 방어하려는 자는 전통이니 바꿀 수 없다고 억지를 쓰기보다는 개혁주의적 논지에 비추어 현재의 내용이 어떻게 옳은지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8. 민주적으로 교회를 운영하면 잡음은 없겠지만 교회의 역동성이 떨어진다.

민주적 조직과 운영은 조직원들의 자발적 헌신과 참여를 높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독재 체제는, 만일 그 독재자가 유능하다면, 확실히 단기간의 운영에 더욱 효율적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가 전문화되고 복잡해질수록 민주적 방식에 의존하지 않고는 장기적 관점에서 효율적인 운영을 기할 수 없다.

특히 공동체 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창조적 발상과 역동성은 민주 체제가 보장하는 열린 의사소통과 기회의 균등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서구의 자본주의 체제가 동구의 공산주의 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장점 때문이 아니다. 진정한 이유는 서구의 민주주의 체제가 동구의 공산 독재 체제와 경쟁하여 승리한 것인데, 핵심은 체제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어떻게 보장했는가에 달렸다.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군사 독재 시절에 급속한 경제 성장에 대한 오해로 독재의 비용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오히려 독재가 급속한 성장에 유익하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이 여전히 나오고 있다.

만일 이 주장이 옳다면 이디 아민 치하의 우간다, 소모사 치하의 니카라과, 김일성 치하의 북한이 가장 빨리 발전한 나라가 됐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도리어 독재의 파멸적 구렁텅이에 빠져서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박정희의 독재 때문에 발전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의 독재에도 불구하고 발전을 이룩한 기적적인 사례에 속한다.

한인 교회는 선교의 대상인 모든 지구촌 공동체에게 구성원들의 자발성과 역동성을 바탕으로 하는 평화와 번영의 문화를 보여주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11058

Saturday, February 23, 2019

영적 성장이란?

질문: 영적인 성장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신앙 생활에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가?

답변: 영적인 성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더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둘 때, 성령께서는 우리가 예수님의 형상을 본받도록 그분을 더욱 닮아가게 하는 과정을 시작하십니다.

영적 성장은 아마 베드로후서 1장 3-9절에 가장 잘 묘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His divine power has given us everything we need for life and godliness through our knowledge of him who called us by his own glory and goodness.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Through these he has given us his very great and precious promises, so that through them you may participate in the divine nature and escape the corruption in the world caused by evil desires.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For this very reason, make every effort to add to your faith goodness; and to goodness, knowledge;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and to knowledge, self-control; and to self-control, perseverance; and to perseverance, godliness;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and to godliness, brotherly kindness; and to brotherly kindness, love.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For if you possess these qualities in increasing measure, they will keep you from being ineffective and unproductive in your knowledge of our Lord Jesus Christ.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But if anyone does not have them, he is nearsighted and blind, and has forgotten that he has been cleansed from his past sins.

이 본문은 우리가 영적인 성장의 목적인 경건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다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목할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오며, 그분을 아는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얻어내는 열쇠라는 사실입니다.(3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 교육과 성장을 위해 주어진 말씀으로부터 기인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3절에는 두 가지 목록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The acts of the sinful nature are obvious: sexual immorality, impurity and debauchery;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idolatry and witchcraft; hatred, discord, jealousy, fits of rage, selfish ambition, dissensions, factions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and envy; drunkenness, orgies, and the like. I warn you, as I did before, that those who live like this will not inherit the kingdom of God.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But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patience, kindness, goodness, faithfulness,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gentleness and self-control. Against such things there is no law.

19-21절은 ‘육체의 일’을 열거합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오기 전에 우리의 삶을 특징 짓던 것들입니다. 육체의 일은 우리가 고백하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성장을 경험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 ‘육체의 일’은 점점 더 감소될 것이 분명합니다.

두 번째 것은 “성령의 열매”의 목록입니다(22-23절). 이런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경험한 지금의 우리의 삶을 반드시 특징 짓습니다. 영적인 성장은 한 신자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점점 더 분명하여지는 것에 의해 확인됩니다.

구원으로 인한 변화가 발생하면 영적 성장은 시작됩니다. 성령님은 우리 안에 내주하십니다(요 14:16-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5:17).

🎯고린도후서 5장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Therefore, if anyone is in Christ, he is a new creation;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그리고 오랜 죄악된 본성은 그리스도를 닮은 새로운 성품에 자리를 내주기 시작합니다(롬 6-7장).

영적 성장은 평생이 걸리는 과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적용하며(딤후 3:16-17) 성령님과 동행하는(갈 5:16-26)것을 기반으로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All Scripture is God-breathed and is useful for teaching, rebuking, correcting and training in righteousness,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so that the man of God may be thoroughly equipped for every good work.

우리는 영적 성장을 추구하면서 하나님께 기도 드려야 하고 우리가 어떤 부분에서 자라나야 하는지 알려달라고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믿음과 지식이 자라나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시며, 영적 성장을 체험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죄를 극복할 수 있으며 꾸준히 우리의 구세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갈 수 있습니다.

(gotquestions.org)

소명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일(직업)

소명으로 부르신 그리스도인의 일(직업)

/ 이원구

1. 창조 목적과 문화 명령

1). 요한계시록 4:11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대로 온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당연하다'고 선언합니다.

🎯요한계시록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 You are worthy, our Lord and God, to receive glory and honor and power, for you created all things, and by your will they were created and have their being."

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1문:
1.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답)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3). 창세기 1:26-28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잘 알려줍니다. 특별히 창세기 1:28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며, 동시에 인간에게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규정해 주시는 명령이라는 뜻에서,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order)'으로 부릅니다.

문화 명령은 인간이 범죄하여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이후에도, 무효화되거나 변경되지 아니하고, 노아, 아브라함, 다윗과 맺은 언약(covenant)으로 이어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완성되었습니다.

칼빈은 이 문화 명령을 기독교 강요에서 '지금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요청이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만 완전하게 성취될 수 있는 대명령'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창세기 1:26-28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 Then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in our likeness, and let them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over the livestock, over all the earth, and over all the creatures that move along the ground."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 So God created man in his own image, in the image of God he created him; male and female he created them.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 God blessed them and said to them, "Be fruitful and increase in number; fill the earth and subdue it. Rule over the fish of the sea and the birds of the air and over every living creature that moves on the ground."

4). 개혁주의 신앙은 모든 문화의 근원은 바로 창조주 성삼위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문화 명령을 완수해야 할 권리와 책임을 가진다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 되심 곧 그의 통치를 인정하고, 그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 지고 그의 나라가 성취되도록 애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생각을 주님의 뜻에 맞추어 순복하며(고후 10:5), 모든 말과 일을 다 주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의지하여 감사하라(골3:17)'고 권면합니다.

🎯고린도후서 10:5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 We demolish arguments and every pretension that sets itself up against the knowledge of God, and we take captive every thought to make it obedient to Christ."

🎯골로새서 3: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 And whatever you do, whether in word or deed, do it all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giving thanks to God the Father through him."

결국 그리스도인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주권적인 뜻을 이루어 드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는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구분없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소명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왕 같은 제사장'

🎯베드로전서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 But you are a chosen people, a royal priesthood, a holy nation, a people belonging to God, that you may declare the praises of him who called you out of darkness into his wonderful light."

1). 소명(召命, 부를 소 / 목숨 명)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칭의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시는 것이 첫 번째 '소명(call, calling)'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땅에서 생존할 수 있도록 특별한 재능을 주시고, 이를 사용하여 삶의 현장에서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소명(vocation, profession, occupation)'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일로 부르시는 두 번째 소명의 의미에 대해서 나눕니다.

2). 벧전 2:9에서 개역개정의 '왕 같은 제사장(a royal priesthood)'을, 표준새번역과 공동번역은, '왕의 제사장'과 '왕가의 제사장'으로 각각 번역했습니다. 성도는 대제사장이시며 만물의 왕이신 그리스도(그리스도의 삼중직분 - 대제사장, 선지자, 왕)에게 속한 이 세상의 제사장임을 고려하면, '왕의' 혹은 '왕에 속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2:9에서, 우리를 택함을 받은 민족, 왕의 제사장들, 거룩한 국민,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그의 백성이 되게 하신 이유가,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업적을 선포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표준새번역).

이것은 우리를 세상의 제사장으로 삼아 주신 분명한 목적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소명과 관련하여 특별히 '왕의 제사장'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개혁주의는 흔히 이것을 '만인제사장설(priesthood of all believers, 萬人祭司長)'이라고 부릅니다.

만인제사장설을 소명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성도의 삶을 성(거룩한 것 곧 교회나 이와 관련된 곳)과 속(거룩하지 않는 곳 곧 교회 밖/일반 세상)으로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제사장은 장소에 제한되지 않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왕의 제사장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의 은혜 안에서, 삶의 자리에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 의지를 최대한 드려서, 교회와 세상을 향해서 동일한 자세로, 주님의 뜻을 실현하여 하나님의 문화 명령를 성실하게 이행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3). 중세 카톨릭 교회는 교회 안의 섬김과 교회 밖의 일을 완전히 구분하여, 성도의 삶을 거룩한 것과 속된 것으로 분리했습니다. 이것을 '성속(聖俗) 이원론 혹은 성속 분리주의(Dualism)'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앙은 이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카톨릭 교회와 같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죄를 사해주는 사제(고해성사)와 같은, '인간 중보자(a human mediator)'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중보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이 이러한 성속의 분리를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은 성과 속의 구분없이 통합적(총체적)이고, 따라서 한 신자의 모든 생각과 행동 양식이 교회 안과 밖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어,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감당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4). 사도 바울의 권면

🎯고린도전서 10:31-33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So whether you eat or drink or whatever you do, do it all for the glory of God. (31)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 Do not cause anyone to stumble, whether Jews, Greeks or the church of God - (32)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 even as I try to please everybody in every way. For I am not seeking my own good but the good of many, so that they may be saved.(33)"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교회 안과 밖의 모든 사람들을 실족시키지 말며,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끼쳐 구원에 이르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은 교회 안과 밖에서 분리되지 않고, 하나로 통합되어 전체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사는 것이기에, 일관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을 가지고 행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삶은 장소와 때에 따라서 어느 것이 더 가치가 있거나, 덜 중요한 것으로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동일한 믿음으로 교회와 세상을 섬깁니다. 물론 섬김의 장소와 시간 그리고 방법은 다르지만, 같은 기독교적 세계관 곧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문화 명령의 이행이라는 가치관으로, 일관되게 살아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3. 일에 대한 오해와 종교 개혁자들의 소명에 대한 입장

1). 일반적으로 많은 성도들이 일을 아담의 타락 후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신 고통스러운 죄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타락전에 에덴 동산의 관리인으로 임명하셨고(창2:15), 또한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땅을 다스리며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창1:26-28).

결국 아담은 타락전에 이미 노동에 대한 정당한 임무를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습니다.

🎯창세기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work it and take care of it."

2).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주셨던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에서도, 6일 동안은 힘써 모든 일을 행하고(9절), 7일째 안식일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10절). 그리고 하나님 자신이 창조를 위해 6일 동안 일하셨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11절).

🎯출애굽기 20:9-11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Six days you shall labor and do all your work,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 but the seventh day is a Sabbath to the LORD your God. On it you shall not do any work, neither you, nor your son or daughter, nor your manservant or maidservant, nor your animals, nor the alien within your gates.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 For in six days the LORD made the heavens and the earth, the sea, and all that is in them, but he rested on the seventh day. Therefore the LORD blessed the Sabbath day and made it holy.

3). 성도의 직업이 곧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이라는, '직업 소명론(vocational calling)'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종교 개혁가는 마틴 루터였습니다.

독일의 사회학자 콘체(W. Conze)는 루터의 직업 소명론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루터는 기독교적 일과 직업 개념에서 '재화를 얻기 위해 일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가르친다. 소비 지출과 자기 복락을 위해서만 노력하며 사는 것은 자본주의 경제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루터 역시 이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거기 그치지 않고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루터가 말한 기독교적 일의 개념은 자기 마음이 돈과 재화에만 의지하며 만족하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현대 경제사회에서는 전혀 받아들 일 수없는 것을 루터는 가르친다. 
루터에게는 일과 직업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이웃을 위한 사랑 실천의 장이다." (출처: 루터의 직업 소명론, 최주훈 목사, 루터교)

그렇다고 루터가 세상의 모든 직업이 거룩하다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세상 직업을 거룩한 소명이며 성직이라고 주장하는 것에는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다. 콘체가 인용했던 것처럼, ‘자신의 일이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고 섬기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루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곧 이웃사랑과 직결된다는 것을 항시 힘주어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각자 자기 직업을 통해 이웃을 섬기는 일이, 곧 세상을 예배로 가득 채우는 길’로 가르쳤습니다 (루터의 탁상담화).

이러한 루터의 가르침은 구약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던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마 22:37-40)과 앞에서 살펴보았던 사도 바울의 권면(고전 10:31-33)과도 일치한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4). 루터를 이어서 종교개혁을 실천했던 칼빈은, 당시 카톨릭 교회가 노동을 신앙생활과는 무관한 세속적 의무로 규정했던 것에 반대하여, 모든 일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참여하는 것으로 인정하고, 노동과 직업에 대한 존엄성과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그는 노동을 영적 구원처럼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며, 일의 거룩성을 인정하고 옹호했습니다.

실제로 칼빈은 그 당시 카톨릭 교회로부터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핍박을 받고 제네바로 도망왔던 피난민들을 위해, 방직 공장을 지어서 많은 일자리를 제공하여 일에 대한 신성한 의무를 성도들이 실천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칼빈은 마태복음 25장 24절(예수님의 달란트 비유)의 주석에서 "인간사회에 유익을 끼치며 사는 삶의 방식보다, 더 하나님에게 칭찬받을 만한 일은 없다"고 말하며, 사회에 대한 봉사를 곧 하나님의 봉사로 이해함으로써, 카톨릭 교회의 성속 분리의 이분법적 직업관을 혁신적으로 타파했습니다.

결국 칼빈은 '모든 일(직업)은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가치를 가지며,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여 경계를 넘지 않아야 하고, 맡겨진 소명에 충실해야 하며,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일이 교회의 섬김과 같이 소중하다'고 밝히면서, '성도의 일(직업)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기독교 강요, 3권 10장)

5). 이러한 소명(직업, 일)에 대한 혁신적인 개혁주의의 해석은, 시민 계급의 대두와 함께 카톨릭 교회의 성속 이원론을 깨고, 유럽 사회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현대 그리스도인의 제사장 역할의 위기

1). 종교개혁 이후에 약 500 년이 지난 지금은,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개혁주의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직업)을 통해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일 삶의 현장에서 세상의 제사장으로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주 중에 세상에서 대충 일하고, 주일에 열심히 교회의 사역을 담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임무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 실제 삶의 자리에서 아무런 영향력 혹은 유익을 미치지 못하게 되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고, 오히려  복음을 약화시키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됩니다.

2). 또다른 분류의 성도들은 주 중의 일터를 오직 선교의 현장으로만 생각하고 일 자체를 소흘히 하여, 직장 생활이나 비지니스에서 실패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이 소명(직업)의 현장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어, 최선의 결과를 내며, 이를 통하여 사람들을 섬기기를 원하십니다.

미국 개척 초기의 청교도 목사였던 토마스 쉐퍼드(Thomas Shepherd)는 소명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늘의 직장(교회)에서 영적인 일을 하게 하실 때 세속적인 생각을 키우는 것이 죄이듯, 하나님께서 이 땅의 직장에서 일하게 하실 때 영적인 생각에 시달려 주의를 빼앗기는 것 또한 어떤 면에서는 커다란 죄이다." (출처: Worldly Saints, Ryken)

3). 우리가 일에 몰두 할 때에, 하나님을 잊고 있다거나 그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는 일을 통해서 세상을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따라서 성도가 일에 전념하지 않거나, 허락하신 영역에서 최고의 전문가가 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며 그의 소명을 이루지 않는 것입니다.

선교사이며 기독교 저자인 오스 기니스박사는 '당신을 향한 소명'에서, "소명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그분께로 부르셨기에, 우리의 존재 전체, 우리의 행위 전체, 우리의 소유 전체가 특별한 헌신과 역동성으로 그분의 소환에 응답하여, 그분을 섬기는 데 투자된다는 진리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또한 같은 책에서, "우리 하나님의 소명에 응답하는 것이 삶의 '궁극적인 존재 이유'이며, 인간의 존재 목적의 가장 고상한 근원이다. 그러한 소명을 떠나서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자 하는 모든 희망은 결국 절망으로 귀결될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4). 반면에 세상의 일(직업)이 삶의 목적이 되어 불신자처럼 사는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직업의 선택이나 일의 과정 모두가 사람을 섬기거나 사회에 봉사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이, 개인적인 성취나 이익의 극대화만을 따라가며, 일터에서 주님께서 당부하신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직장인 혹은 비지니스 맨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 그리스도인 직장인 혹은 비지니스 맨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일이 목적이 된 삶과 일이 소명이 된 삶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일을 통해 이웃을 섬기며 우리의 존재 목적 곧 소명을 구현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5. 소명을 통한 하나님의 크신 뜻과 그리스도인의 책임

1).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일터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그 시간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있지 못한다거나 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반면에 하루 24시간 교회나 관련된 곳에서 신앙적인 일을 해야만,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또한 버려야 합니다.

예를들면 오페라 가수로 수년간 음악교육을 받고 전문 오페라단에서 일하는 그리스도인 성악가는, 최선을 다해서 연습하고 준비해서 주어진 배역의 노래를 잘 불러서 청중들에게 가장 좋은 노래를 들려주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을 발휘하여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 이것은 주일에 성가대에서 성가를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과 동일하게 중요하며 영광을 드리는 일입니다.왜냐하면 이 오페라 가수에게는 공연 현장이 바로 하나님께서 소명으로 부르신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2). 소명의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영광를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게 주신 재능이나 은사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잘 개발하고 훈련해야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책임을 무시하고, 단순히 좋아하며 재미있는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소망이라고 착각하지 않아야 합니다. 딤전 5:8은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지 않는 자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맡겨준 가족과 친지들을 부양하며, 사회의 도덕적인 혹은 윤리적인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재능을 사용해서 보람을 가질 수 있는 소명의 자리로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지 않으면서 그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시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시거나 동일한 은사를 주시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전에 목수였고, 베드로는 어부였으며, 바울은 천막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와 사회를 위해서 모든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재능)을 주시고 일하게 하시며, 이를 통하여 서로를 섬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3). 하나님께서 주신 작업은 귀하고 천한 일이 없습니다. 루터는 '사제가 말씀을 강론(설교)하는 일이나 농부가 밭에서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게 귀중한 일'이라고, 자신의 여러 글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루터는 우리 모두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모두가 영적이며, 참된 제사장이라고 강조합니다. (독일의 그리스도인 귀족을 위한 3개의 논문)

우리들 마음 속에 깊이 잠재하고 있는 오류 곧 교회(신앙) 혹은 이와 관련된 일은 거룩한 것이고, 삶의 현장에서 행하는 일은 속되다는, 성속 이원론(혹은 분리론)을 완전히 버려야만,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완수하며 영광을 드리게 됩니다.

주 중에 아침에 일어나 일터로 향하는 것은, 주일 아침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것과, 동일하게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4). '만인제사장설'은 성도의 소명에 대한 차별과 서열 혹은 오만이나 특권을 거부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28-29에서, 모든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라고 이렇게 강조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There is neither Jew nor Greek, slave nor free, male nor female, for you are all one in Christ Jesus.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 If you belong to Christ, then you are Abrahams seed, and heirs according to the promise."

하지만 만인제사장설이 교회 안에서 전임사역자의 역할이나 리더십 혹은 재량권을 무시하지 않는 것처럼, 전임사역자에게만 영적 의무가 주어져 있다고도 주장하지 않습니다.

전임서역자와 일반 성도는 교회의 안과 밖에서, 비록 다른 역할을 맡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제사장으로서 동일한 의무와 책임을 가집니다.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인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영광를 구할 때에, 교회의 안과 밖에서 모두 거룩하고 신성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5). 우리의 일 곧 소명은 단순히 생계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방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소명의 자리로 부르셨고, 우리 또한 소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며 영화롭게 합니다.

우리 모두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거룩한 성도입니다. 어느 직업이든 이웃의 유익을 도모하며 서로를 높이고 섬긴다면, 교회 안과 밖의 소명이 '함께' 거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