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ugust 30, 2018

요한계시록의 전통적 4가지 해석 비교 및 분석

요한계시록의 전통적 4가지 해석 비교 및 분석

송영목 목사(고신대대학교회. 부경성경연구원장)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는 4가지 방법이 있어 왔다 (참고. 페이트, 1999:19-41):
(1) 본문의 의미를 1세기 요한 당시로부터 찾으려는 과거론적 해석 (preterist interpretation);
(2)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미래의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미래론적 해석 (futuristic interpretation);
(3) 구체적인 역사성을 무시하고 하나님 (교회, 선)과 사단 (불신 세상, 악) 사이의 대결로 이해하려는 이상주의적 해석 (idealistic interpretation);
(4) 주석가 자신이 처한 세상의 형편과 교회의 상황에 따라 해석하려는 세상-교회 역사적 해석 (world-church historical interpretation).

과거론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으로는 J.E. Adams, M. Ashcraft, P. Carrington, D.S. Clark, D. Chilton, K. Gentry, M. Stuart, M.S. Terry 등이다.

미래론을 따르는 사람은 D.G. Barnhouse, A.C. Gaebelein, H.A. Ironside, G.E. Ladd, H. Linsay, H.M. Morris, R.H. Mounce, J.A. Seiss, R.C. Stedman, L. Strauss, M.C. Tenney, J. Walvoord 등이다.

이상적 해석을 따르는 이는 H. Alford, W. Hendriksen, R.C.H. Lenski, W. Milligan, E. Morey, L. Morris, S.L. Morris, R.J. Rushdoony, M. Wilcock, G.B. Wilson 등이다.

역사적 해석을 따르는 사람은 J. Pinkoski, E.B. Elliott, A. Clarke, R. Caringola, A. Barnes 등이다. 이상의 4가지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이 4가지 해석 이외에, 특히 AD 6-8세기에 '풍유적 해석'이 여러 주석에 나타났다. 예를 들어, Primasius (c. 550), Alcuin (c. 735-800), Rabanus Maurus (c. 775-836), Walafrid Strabo (c. 807-849), Cassiodorius, Apringius, Bede, Beatus와 같은 중세 초기의 계시록 저술가들은 전체적으로 신비적인 해석을 따랐는데, 세부적인 주석에는 그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었다. 이런 차이는 이들 개인의 공상 혹은 그들 당시의 필요나 사상의 영향에 기인했다. 흥미로운 점은 4가지 전통적 해석을 나름대로 통합한 주석가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AD 6세기 초의 갑바도기아의 Andreas는 가장 위대한 헬라 주석을 썼는데, 그는 여러 이른 사람들의 관점 (예. 영적 그리고 문자적)을 통합시켜서 해석을 했다. 9세기의 Berengaud는 신비적 해석과 역사적 해석을 결합시켜 계시록의 내용이 인간의 모든 역사를 다루는 것으로 보았다.

이제 Steve Gregg (1997)의 병행 주석을 기초로 하여, 이 4가지 해석은 계시록의 주요 본문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지 살펴보자. 필요 시 미래론자로 분류되는 세대주의자들의 견해가 소개될 것이며, 성격상 전통적인 견해들을 언급할 필요가 없는 구절에서는 적절하게 다른 방식으로 설명할 것이다.

1. 계시록 1장의 주요 구절들

계 1:1절의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과거론자들은 AD 70년 직전에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했기에 AD 70년 사건의 긴박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역사주의자들은 요한의 시대 직후에 시작하여 전 교회 시대에 일어날 일로 본다. 미래론자들은 '속히'를 '갑자기'로 보면서 적당한 시점 특히 요한 당시로부터 수 천 년 이후에 성취가 신속히 될 것으로 이해한다. 미래론자들은 '속히'를 문자적으로 '가까운 시기에'로 보기도 하지만, 하루를 천년으로 삼는 하나님의 계산법을 강조하여 실제적으로 '단기간 내에' 라는 의미로는 보지 않는다 (참고. 벧후 3:8). 따라서 어떤 일이 수 천 년 이후에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가까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요한의 일차 수신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시간관을 공유했을지 그리고 먼 미래의 사건을 가까운 것으로 여겼을지 심히 의심된다.

계 1:7-8절의 구름타고 오시는 그리스도에 관한 해석도 전통적인 4가지 해석가들을 나누고 만다. 과거론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문자적인 재림을 가리키지 않고, 예루살렘 파괴를 위한 예수님의 오심을 상징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본다. 즉 예수님이 육체적이며 가시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로마 군대를 심판의 도구로 하여 영적으로 방문하심이라고 주장한다. 계시록 안에 오심이라는 단어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계 2:5; 3:20; 신 33:2; 참고. 사 19:1; 슥 1:6; 말 3:1-2). 그리고 '구름을 타고'는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상징으로도 쓰이며, 구약에서 세상의 끝이 아니라 역사적 심판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시 104:3; 사 19:1). '그를 찌른 자들도 볼 터이요'는 문자적으로 예수님을 처형한 사람들이 생존할 당시에 주님이 영적으로 심판하러 오신다는 의미로 본다 (참고. 마 16:28; 24:30, 34; 26:64).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라'에서 '땅' (ge)은 이스라엘 땅 (land)이지, 'earth'는 아니다 (참고. 슥 12:10). 온 세상은 족속으로 나뉘지 않고, 이스라엘이 족속으로 나뉜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더욱 설득력을 가진다. 미래론자들은 구름타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것이라고 본다. 역사주의자들은 이 구절을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되,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모든 시대마다 계속해서 오시는 것으로도 본다. 역사주의자들과 유사하게 이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보되, 그리스도의 오심을 시대마다 있을 그리스도의 심판이라는 영적인 의미로 보기도 한다.

계 1:19절의 '장차 될 일'을 과거론자들은 계시록이 돌 성전 파괴 전에 기록되었기에 돌 성전 파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세대주의적 미래론자들은 '이제 있는 일'을 교회 시대에 적합한 발전으로 보면서 계 2-3장의 내용으로 본다. 세대주의자들도 '이것들 후에'에서 '이것들'을 교회 시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 견해에 의하면 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 계 4:1절은 교회의 휴거와 교회 시대의 끝으로 본다.

2. 계시록 2-3장의 7편지

소아시아의 7교회에게 주는 편지는 그 자체로 예언적인 성격이 아니기에 전통적인 4가지 해석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과거론자와 이상론자 그리고 많은 미래론자들도 실제 역사적 교회에게 주는 편지로 본다. 그러나 역사주의자들과 몇몇 미래론자들은 각 각의 편지들 사이의 평행에 주목하면서 요한 이래로 지금까지의 교회사의 연속적인 기간에 주목한다. 따라서 그들은 7편지를 전체 교회 시대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것으로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에베소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사도 시대부터 AD 100년까지의 상황을, 서머나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AD 100-AD 313년 사이의 박해의 기간을, 버가모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된 AD 313년에서 교황주의의 발현 (AD 500년) 사이의 교회의 거짓 교리와의 혼합주의 시대를, 두아디라 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교회 개혁까지의 교황주의 시대 (500-1500년)를, 사데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교회 개혁 시대인 1500-1700년 사이를, 빌라델피아교회에게 보낸 편지는 선교 활동을 다시 경험한 1700년에서 오늘까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것은 전체 교회의 시대 중에서 각 시대와 계 2-3장의 7편지 중 해당 편지의 내용 사이의 유사점에 근거한 기발한 해석이다. 이 관점은 역사주의적 해석에서 시작되었지만 현대에는 미래론자 중에서 세대주의자들에게서 발견된다.

3. 계시록 4-5장의 보좌 환상

요한이 본 보좌 환상이 시작되는 계 4장부터 4가지 견해는 다시 자기 색깔을 낸다. 역사주의자에 의하면, 요한은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미래를 여시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특권에 주의를 기울이도록 한다. 과거주의자는 하늘 보좌를 법정으로 보면서 원고는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이며, 피고는 예루살렘인데 비난 받기 직전이다. 계 5:1절은 1시기 당시에 곧 일어날 것으로 본다. 미래론적 해석은 계시록의 주요 전환점을 계 4:1절로 본다. 계 4:1절 이전의 장들은 "네가 본 것들'과 '이제 있는 것들' (계 1:19)에 해당한다. 세대주의자에게 있어서, "이 일 후에'는 '교회의 것들 이후에', 혹은 '교회 시대 이후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계 4:1절 이후의 계시록의 내용은 교회 시대 이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몇 몇은 요한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교회의 휴거의 그림자로 보며, '나팔 소리 같은 그 음성' (계 4:1)은 최후의 나팔을 가리키는 고전 15:51-54절의 휴거의 언어와 천사장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언급하는 살전 4:16-18절을 연상시킨다고 본다. 세대주의적 미래론자들은 교회는 이 구절 이후로 땅 위에는 보이지 않으며 단지 하늘에만 보인다고 주장한다 (계 7:9-17). 하지만 세대주의를 따르지 않는 미래론자들은 계 4:1절을 교회의 휴거와 연결시키지 않지만, 세대주의자처럼 계 4-19장은 미래적 환난이 주요 주제임을 인정한다. 이상주의자들은 '이 일 후에'를 "이것은 다음에 일어날 일이다"라는 뜻이 아니라, "이것은 내가 그 다음에 보았던 환상이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계 1-3장에 걸쳐서 지상의 관점에서 묘사된 전체 교회 시대는 이제 천상의 관점에서 나타난다. 계시록에서 40회나 등장하는 '보좌(들)'라는 말은 역사의 전체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핍박받는 공동체에게 위로를 준다.

4. 계시록 6장의 일곱 인의 재앙

역사주의자들은 두루마리의 개봉이 로마 제국의 멸망의 시작을 나타낸다고 본다. 7인의 개봉은 도미티안 (d. AD 96)의 통치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그리고 고트족과 반달족의 침입으로 로마제국이 쇠망해 가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본다. 과거론적 해석은 일곱 인으로 인봉된 두루마리 (계 5:1)는 예루살렘을 향한 하나님의 판결문인데, 일곱 인의 개봉은 유대-로마 전쟁 시에 있을 유대인들이 겪은 위기를 묘사한다. 그 당시 144,000으로 상징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요단강 동편의 '펠라'로 도망간다. 말 탄 4명은 유대의 반란을 잠재우려고 이스라엘을 침입한 로마 군대를 상징하며, 그 때 피 흘림, 내전, 기근, 죽음, 그리고 궁극적으로 예루살렘의 파괴로 이어졌다고 본다. 미래론자들은 두루마리와 그것의 개봉이 교회의 휴거와 대환난의 시작을 뜻한다고 본다 (계 4:1; 특히 세대주의자들이 이 입장을 취함). 144,000의 유대인들이 마지막 때에 인침을 받아 구원을 받는다고 본다. 종말 때에 적그리스도가 흰 말을 타고 정복하려고 시도하며, 전쟁과 기근과 우주적인 곤경 (아마 핵전쟁으로)이 따를 것이라고 본다. 이상주의적 해석에 의하면 두루마리와 그것의 개봉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다루시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은 특히 역사 전반에 걸쳐서 등장하는 전쟁과 순교 그리고 심판의 사이클에 주목한다. 이상주의자들은 특정한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키지 않고 7인의 환상을 역사 속에서 인간의 왕국은 흥망성쇠를 거듭하지만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며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으로 본다.

5. 계시록 7장의 하나님의 종들이 인침을 받음

일곱 인의 재앙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일곱 번째 인은 계 8:1절에서 떼어진다. 그러므로 계 7장은 여섯 번째 인과 일곱 번째 인 사이의 간막극 (intermezzo)과 같다. 과거론자들은 이렇게 계 7장처럼 간막극이 필요한 것은 첫 여섯 개의 인들이 떼어질 때 배교한 이스라엘이 받을 심판에 초점이 맞추어 졌기에 "과연 그렇다면 누가 심판의 와중에서 구원을 얻을 것인가?" (계 6:17)에 대한 답을 주려는 것으로 본다. 계 7:1-3절처럼 구약에서 바벨론이 남 유다를 점령하기 전에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남은 자의 이마에 인을 치는 환상을 보여주셨다 (참고. 겔 9). 유대-로마 전쟁 시에 실제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펠라'로 도망가서 생존했다. 역사주의적 해석에 의하면 하나님의 종에게 인을 치는 것은 4세기 콘스탄틴과 그의 치하에서 정치-종교적인 혁명과 관련된다. 여섯 번째 나팔을 로마를 침공하는 야만인을 본 A. Barnes는 계 7:1절의 네 바람은 로마를 멸망시키는 임박한 전쟁들 혹은 콘스탄틴 때에 교회 안에 닥친 도덕적 해이와 이단 세력 (예. 아리우스, 펠라기우스)으로 본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에 하나님은 자신의 참된 백성들이 누구인지 명시할 필요를 느끼셨다. 이것이 바로 인을 치는 것이다. 인을 치는 것을 교회 개혁 시대까지의 왈도파와 알비파로 보기도 한다. Henry와 Clarke는 넓은 의미에서 역사주의자들인데, 계 6-7장을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보는 과거론자들의 입장과 대동소이하다. 땅의 사방의 바람 (계 7:1)을 유대 땅의 네 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서, 바람이 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강해지고 예루살렘으로부터 펠라로 도망갈 준비를 할 때 까지 유대 땅 전체를 악으로부터 보호하시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Clarke). 미래적 해석 중 세대주의자들은 네 바람, 네 천사, 그리고 땅의 네 모퉁이 모두 문자적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천사가 바람과 같은 자연의 요소를 통제한다고 본다. 이 네 천사의 임무는 특정 그룹이 인을 받을 때까지 이런 자연적인 요소들의 노가 폭발하지 않도록 억제하는 것이다. 이상적 해석은 계 7:1절의 '이 일 후에'를 사건의 연속으로 보지 않고 요한에게 보여진 환상들의 순서로 본다. 정지된 네 바람은 계 6장의 네 말 탄자로 본다 (참고. 슥 6:5). 심판의 와중에서 누가 구원을 얻을 것인가라는 계 6:17절의 질문에 대한 답이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는 계 7장이다. 계 6장의 네 말의 심판은 하나님의 백성이 인침을 받아 보호되기 전까지는 시행되지 않는다.

6. 계시록 8-9장의 일곱 나팔의 재앙

역사주의자들은 7나팔이 로마제국을 겨냥한 반달족, 훈족, 사라센 그리고 투르크와 같은 이방 민족의 침공의 시리즈로 본다. 6번째 나팔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투르크에게 함락된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작은 책은 인쇄 기술이 발명된 이후의 유럽에서 미사에서 사용된 성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과거론자들은 첫 번째 4개의 나팔은 유대-로마 전쟁에서 로마인이 유대인에게 가한 고통으로 본다 (AD 66-70). 다섯 번째 나팔은 아마도 마귀가 포위된 유대인들이 스스로 비이성적으로 파괴적인 행동을 하도록 만든 것으로 본다. 여섯 번째 나팔은 로마 군대를 가리키는데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죽이며 추방시켜 버린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미래론자들은 문자적이건 상징적이건 나팔은 7년 대 환난 동안 땅에 사는 회개하지 않은 자들이 겪을 재앙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재난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직접 나온 초자연적인 것이거나 아니면 지구와 기술에 대한 인간의 남용과 부적절한 청지기직 수행에서 나온 재앙적인 결과이다 (예. 핵무기). 이상주의자들은 재앙들이 애굽에 내려진 10가지 재앙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보면서, 재앙은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죄인에게 반복적으로 임했고, 구약에서 나팔이 경고의 의미를 담듯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불쾌함의 표현이다. 시대마다 죄인은 이러한 고난을 반항으로 흡수해 버리는데, 회개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7. 시간적 표현들: '1260일, 마흔 두 달, 한 때 두 때 반 때' (계 11:2, 3; 12:6, 14)

계시록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3년 6개월과 관련된 해석을 살펴보자. 이것은 문자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상징적 해석을 요구하는가? 그리고 이것과 관련된 일은 언제 일어나는가? 역사주의자들은 계 11장의 성전 측량이 16세기 교회개혁 시기에 교황 교회의 와중에서 참된 남은 자 교회를 결정하는 것으로 본다. 1260일은 글자 그대로 1260년이며 그 동안 교황의 권세가 지속되었다. 두 증인은 교회 개혁 이전의 왈도파 (Waldenses)와 알비파 (Albigenses)를 가리킨다. 계 12장의 임신하여 출산한 여인은 AD 313년 이전에 로마 제국에게 박해를 받은 가시적 교회를 상징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남자 아기는 콘스탄틴의 재위로 인해서 신원을 받은 참 교회를 상징한다. 과거론자들은 1260일과 관련된 모든 표현들을 유대전쟁 혹은 네로 박해 시기 중 하나 혹은 둘 다로 본다. 두 증인은 예루살렘 파괴 이전에 유대인을 향한 역사적이고 예언적인 증거 혹은 이스라엘 안의 시민적이고 종교적인 권위의 대표로 본다.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여인은 아이로 나타나는 교회를 출산하는데, 교회는 유대-로마 전쟁 시에 예루살렘을 탈출하여 도망가지만 사단에게 박해를 받는다. 1260일을 미래주의자들은 대 환난의 마지막에 있을 문자적인 3년 반의 기간 혹은 전체 7년 중의 두 개의 다른 기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두 증인은 예루살렘에 나타날 두 증인인데, 모세와 엘리야 혹은 에녹과 엘리야를 가리킨다. 혹은 두 증인을 더 큰 증인들의 무리로 보기도 한다. 출산한 여인은 신실한 이스라엘인데 대 환난 기간 동안 적그리스도에게 핍박을 받아 광야로 내 몰릴 것이다. 이상적 해석은 1260일을 전체 교회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두 증인은 교회 시대 전반에 걸친 교회로 본다. 광야에 잇는 여인도 동일한 교회이다.

8. 계시록 13장의 사단의 삼위 일체

계 13장의 용,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 그리고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에 관한 입장을 들어보자. 계 12:9절이 '용'을 사단이라고 명시적으로 밝히기에 이와 관련하여 별 이견은 없다. 역사주의자들은 바다 짐승을 로마제국으로 본다. 실제로 단 7장의 네 번 째 짐승의 모습과 비슷하다. 전환적 과거론자들은 바다 짐승을 로마 혹은 구체적으로 네로 황제로 본다. 미래론자들은 바다 짐승을 로마 혹은 이방 세력으로 본다. 이상주의적 해석은 바다 짐승을 사단의 휘하에 있는 세상 정부 권력으로 본다. 로마에서도 볼 수 있고 나중에는 적그리스도에게서도 이러한 박해의 권세를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역사주의자는 두 짐승에 관하여 자기네 서클 안에서도 의견이 상이하다. 하지만 둘 째 짐승에 관해서는 교황적 로마 (papal Rome) 혹은 로마 교회의 제사장직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다. 계 13:11절의 '새끼 양 같은 두 뿔'을 그레고리 황제 (AD 590) 이래로 천주교의 주교들이 양모로 만든 큰 외투를 입고 Goruti ('the horned ones')라는 관을 쓴 것으로 본다 (양의 옷을 입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 마 7:15; 계 16:13). 과거론자들은 땅 짐승을 시저를 숭배하도록 하는 로마 제국 안의 세력으로 본다. 어떤 과거론자는 땅 짐승을 네로 치하의 유대 땅에 있는 로마의 알비누스와 (더 가능성 있게) 플로루스와 같은 총독으로 본다 (Russell). 미래론자들은 땅 짐승의 두 뿔을 바다 짐승 만큼은 안 되는 힘을 상징하고, 정치적 권세자를 상징하는 바다 짐승과는 달리 땅 짐승은 종교적 지도자로 본다 (땅 짐승은 거짓 선지자이다; 계 16:13; 19:20; 20:10). 혹자는 땅 짐승을 인물이 아니라 개념으로 보면서, 세속 권력을 숭배하도록 만드는 거짓 종교의 역할 혹은 사악한 목적을 위해 조직화 된 종교로 보기도 한다. 그래서 휴머니즘의 우주적 승리로 보기도 한다 (Ladd, Mounce). 하지만 많은 미래론자들은 땅 짐승을 로마 교회의 우두머리로 보기도 한다 (Walvoord). 혹은 땅 짐승을 적그리스도로 본다 (Gaebelein). 이상주의자는 거칠고 사나운 바다 짐승과는 달리 온유한 모습으로 속이기에 적절한 땅 짐승을 역사 전체에 등장하는 거짓 종교와 거짓 철학으로 본다 (Hendriksen). 혹은 이 짐승을 세상 권력의 종으로서의 거짓 종교로 보기도 한다 (Wilson).  

여기서도 요한 당시의 독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과거론적 입장이 설득력을 가진다. 그들은 땅 짐승이라고 하면 어떤 실제적인 사람들 혹은 세력을 자연스럽게 떠 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9. 계시록 16장의 일곱 대접의 재앙

역사주의자들은 일곱 대접은 세속 역사의 종말과 그리스도의 궁극적인 승리까지 뻗어가는 계 8:1절의 일곱 번째 나팔 속에 포함된 것으로 본다. 비록 대접들이 담고 있던 재앙들은 부어져서 대접이 신속히 비워졌지만, 2세기 혹은 그 이상의 세상 역사 속에서 펼쳐질 일을 다룬다. 특히 18세기 프랑스 혁명으로 시작하여 지금까지 역사 속에서 성취되지 않은 사건들까지이다. 일곱 나팔의 재앙이 이방 로마 제국의 멸망을 위한 것이듯이, 7대접의 재앙은 교황이 다스리는 로마의 파괴를 묘사한다. 과거론자들은 7대접의 재앙을 받을 사람들이 누구인지에 관해서 의견을 달리한다. D. Chilton과 같은 철저 과거론자들은 여전히 배교한 이스라엘 백성이 대상이라고 보지만, J.E. Adams와 같은 전환적 과거론자들은 로마제국이라고 본다. 미래론자들은 각각의 천사들이 "가서 대접을 부어라"는 명령을 동시에 받았는데, 이 재앙은 순서대로 일어날 것이라고 본다. 세대주의자들은 대접 재앙을 문자적으로 가급적 이해하려고 하지만 (Lindsey, Walvoord, Ryrie, Seiss), 일부 미래론자들은 상징적으로 이해한다 (Gaebelein, Ironside). 이 최종적인 재앙은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본다. 이상주의자들은 7대접 심판이 애굽에 임한 10재앙과 유사함에 주목하면서, 사단의 통치 하에 있는 악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본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은 이 땡에도 구원을 받는다. 대접 심판을 로마 제국에 대한 심판을 포함하여 모든 시대에 임할 심판으로 보지만, 이상주의자들 사이에 대접 재앙의 성격이 문자적인지 아니면 상징적인지 의견이 나누인다. 첨언하면,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의 심판에 대해서 동일한 사건을 점층법적으로 묘사한다는 반복적 입장으로 보는 것은 과거론적 해석이고, 첫 번째에서 일곱 번째 가지 시간 순서대로 일어난다는 연대기적 입장은 미래론적 해석 그리고 역사주의적 해석이다. 이상적 해석은 역사적 지시성을 무시하는 무역사성의 경향이 짙다.

10. 계시록 17-19장의 음녀 바벨론

바벨론이 무엇을 상징하며 언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인가? 역사주의자들은 바벨론의 파멸을 미래에 있을 것처럼 묘사된 종교와 정치적인 교황 체제의 전복으로 본다. 계 17-19장은 참 종교에 대한 신원에 관한 경건한 자와 불경건한 자의 다양한 반응을 다룬다. 계 19:11절의 흰 말을 탄자는 그분의 말씀을 통한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정복 혹은 그리스도의 다른 적들에 대한 심판을 위한 계속적인 정복을 상징한다. 과거론자들은 바벨론을 예루살렘 혹은 로마와 동일시한다. 만일 바벨론이 로마라면 계 17-19장은 로마 제국 특히 음녀인 로마 도시의 멸망을 뜻한다. 만일 바벨론이 예루살렘이라면 이 환상들은 그 도시가 로마 군대에 의해서 불타는 것과 그것에 대한 악인과 선인의 반응을 묘사한다. 미래론자들은 바벨론을 로마 교회 혹은 종말에 적그리스도의 인도 하에 형성될 배교한 종교적 체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다르게는 바벨론을 고대 바벨론 도시가 다시 회복된 것 혹은 회복된 로마로 본다. 하여간 이 진리와 의의 대적은 환난의 끝에 파괴될 것이며, 악인에게는 원통함이, 의인에게는 기쁨을 가져다준다. 이상주의적 해석에 따르면 바벨론은 경건한 자들의 유혹자로서의 세상의 시스템을 상징한다. 종말 시에 바벨론이 파멸될 것이 계시록에서는 요한 당시에 로마가 파괴될 것으로 묘사된다. 이 음녀에 대한 궁극적인 심판은 흰 말을 타시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수행될 것이다. 대안적 설명은 백마를 탄자는 복음 전파를 통하여 세상의 시스템을 정복하는 그리스도의 점진적인 승리를 상징한다.

계 19장의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역사주의자들은 교황 체계의 붕괴와 더불어 교회가 복음과 그리스도의 승리적 통치를 축하함으로써 세상 나라를 정복하여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으로 본다. 계 19:1절의 '할렐루야'가 히브리어에서 온 단어이기에 유대인들이 개종하여 지상의 교회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할 것으로 본다. 어린양의 혼인 (계 19:7)을 천년왕국에 관한 입장을 어떻게 취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이해하는데, 교황 체제가 붕괴된 후에 교회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영원한 연합으로 본다 (Barnes). 혹은 현재의 교회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이도 있으며,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는 미래에 더 강화될 것이다 (Caringola). 과거론자들은 계 19:1-6절과 계 11:14-19절의 간본문에 주의하면서 결혼을 위해 준비된 신부의 출현은 새 언약이 완전히 성취도기 위해서 성전이 열리는 것과 관련된다. 음녀 바벨론은 파괴되지만 정결한 신부인 여자는 신랑과 결혼한다. 이것은 이혼과 결혼이라는 언약적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새 언약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신부의 존재 그 자체는 구원의 시대 안에 전적으로 새로운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린다. AD 70년의 배교한 신부와의 이혼으로, 하나님은 이방인도 이제 새 언약 백성 즉 자신의 신부로 영접하신다. 이처럼 과거론자들은 대부분 계시록의 AD 70년 이전 저작을 주장하기에 특별히 옛 언약에서 새 언약으로의 전환을 강조한다. 미래론자들은 계 19장의 혼인을 천상의 것으로 보기에 신부를 이스라엘로 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론자들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깨어진 결혼관계의 회복이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회개를 통해서 이루어질 것을 예언한다 (Gaebelein). 세대주의자들은 혼인 시기를 교회가 휴거된 직후로 본다. 계 19:9절의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부름을 받은 자를 신랑 예수님의 친구들로 보면서 (요 3:29), 신부인 교회의 구성원은 아니지만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아주 모호하게) 본다 (Ryrie). 이들을 과거와 미래 시대의 성도로 보는 이도 있다 (Walvoord). 그러나 교회와 초청받은 자를 동일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면서 세대주의자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도 있다 (Mounce, Ladd). 미래론자들과 유사하게 이상주의자들은 계 19방을 계시록에서 다섯 번째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는 단락으로 본다 (참고. 계 6:12절 이하; 11:5절 이하; 14:14절 이하; 16:17절 이하). 혼인의 날짜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로 본다. 마 22:2절과 26:29절을 참고하여 신부와 혼인 잔치에 참여하도록 초청된 자를 동일 인물로 본다.

11. 계시록 20장의 천년왕국

천년왕국설은 근원은 BC 1세기 이후에 널리 유행한 유대인들의 메시아 시대에 관한 생각에서 찾을 수 있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신앙은 시대에 따라 변했다. 그러나 그 근본은 언제나 메시아가 와서 이 땅에 새 시대를 세우실 것인데 그 때는 유대민족이 최고의 위치에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AD 100년경부터는 이 땅이 극악하여 메시아가 이 세상에 한정된 기간 동안 통치한 다음에 이 땅에 최후가 임할 것이라고 보았다 (참고. 바룩 2서 40.3; 에녹 1서 93.3-10). 이 땅에 임할 메시아 시대는 얼마나 지속되는가? 40년, 100년, 400년 (창 15:13; 에스라 4서 7:28-29), 600년, 1000년 (시 90:4; 벧후 3:8; 바룩 2서 29:5-6; 73), 2000년, 7000년 등 다양한 이론이 있다.  하지만 유세비우스는 문자적 천년왕국설을 따르는 파피아스를 몰이해 한 것에 기인한 것으로 비판했다 (교회사 3.38). 이 천년왕국설이 물질적 복에 너무 기울어지면서, 오리겐 등에 의해서 더욱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참고. 민병섭, 2002:44-45). 계 20장의 천년왕국에 관해서는 전통적인 4가지 입장보다는 무천년, 전천년, 후천년주의의 입장으로 나누는 것이 관례이다. 계시록의 주제 구절인 계 11:15절과 12:10-12절을 제대로 해석한 그룹이 있다. 그들은 미국 Texas의 Tyler시를 중심으로 한 Christian Reconstruction Movement에 헌신한 사람들 인데, G. De Mar, J.B. Jordan, D. Chilton과 같은 '후천년적인 부분적 과거론자'이다.

12. 계시록 21-22장의 새 예루살렘과 신천신지

새 예루살렘과 신천신지에 관해서도 전통적인 4가지 입장 보다는 문자적 해석과 비문자적 해석의 입장으로 나누는 것이 관례이다. 문자적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천년왕국이 마쳐질 때 (전천년주의자) 혹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몇 몇 무천년주의자와 후천년주의자) 임할 새로운 행성과 우주의 모습을 문자적으로 묘사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구원 받은 사람들의 영원한 집으로 이해한다. 비문자적으로 해석하는 사람은 하늘의 존재의 비물질적인 상태에 적용한다. 신천신지를 고후 5:17절의 새로운 피조물과 연결시키기도 하는데, 옛 언약이 지나간 후 새 언약 속에 하나님과의 언약 속에 있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새 예루살렘은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막과 지성소적 이미지로 나타난 지상의 교회 (장소성이 아니라 인격성)의 현재적인 모습 그 자체이다.

나오면서 

이상의 4가지 전통적 견해를 평가해 보자. 이상주의적 해석과 미래적 해석 그리고 역사주의적 해석은 '석의' (exegesis, what it meant)가 아니라 '적용' (application, what it means)이다. 이상주의적, 미래적, 이상적 해석은 모두 요한 당시로부터 '미래'에 발생할 일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계시록은 '예언적 편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편지는 무엇보다도 그 내용이 1차 수신자 당대에 적합성을 가져야 한다. 사도 요한 당시의 관점에서 '반드시 속히 될 일' (계 1:1, 3; 22:6)을 잘 살피는 과거적 해석이 '석의'에 해당한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 주석과 적용은 구분되어야 한다. 천년왕국과 신천신지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4가지 입장에 따라 구분되기보다는 문자적인가 문자적인가로 구분된다. 소아시아 7교회의 박해자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루는 7인-7나팔-7대접 재앙의 반복적인 메시지를와 계시록의 주제인 계 11:15절과 12:10-12절에 근거해 볼 때 박해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승리적 진군이라는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후천년적 무천년주의'가 설득력을 갖는다. 계시록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은 요한 당시의 독자들이 잘 알고 있던 상황을 염두에 둔 것이거나 구약에서 빌려온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징이 사용된 구약의 문맥을 고려하되,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말고 상징적으로 해석하되, 상징이 가지는 1세기 당시의 역사적 지시성 혹은 역사적 관련성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요약하면, 요한 당시의 관점에서 속히 일어날 사건을 예언한 계시록의 메시지를 과거 즉 1세기 문맥에서 살펴본 후, 특히 이상주의적인 해석의 도움으로 우리 시대에 적용하면 된다.   

참고문헌 

GREGG, S. 1997. Revelation four views: a parallel commentary.    Nashville : Nelson. 
민병섭. 2002. 요한의 묵시록. 분도출판사. 
C.M. 페이트. 1999. 요한계시록을 이해하는 4가지 견해. 아가페. 

송영목 목사 /고신대 대학교회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Monday, August 27, 2018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양종관 목사)

기독교 영성이란 무엇인가?(1)

/ 올네이션스교회 양종관 목사

(1)
요즘 ‘영성’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쉽게 난무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온갖 종류의 분야와 (철학, 문학, 정치, 의술, 예술, 스포츠, 문화, 레져, 사회, 등) 여러 종교와 이단, 사이비까지 영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게 볼 때 ‘영성’이라는 단어는 우리 기독교만의 점유물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러한 ‘영성’의 난무 속에서, 과연 ‘우리 기독교 영성은 무엇인가?’하는 부분이 이제는 분명히 정리되어야 할 것 같다.

그래서 이번 기회를 통해, 지면으로 독자들과 함께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나누고자 한다. 먼저 밝히는 것은 나는 영성 신학자도 아니요, 전공자도 아니요, 단지 목회 현장에서 목회하는 목사이기에,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나눌 것임을 미리 밝힌다.

한 가지 더 밝힐 것이 있다. 요즘 교회들과 선교 단체들과 나름대로의 공동체 개념을 가지고 있는 많은 곳에서 ‘기독교 영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의 대부분이 천주교 영성 가들이 말하던 바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상당히 많은 분들이 천주교의 예수회((Jesuits)의 창시자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Ignatius Loyola, 1491~1556)적인 의미의 영성과 그가 말한 ‘영신 수련’에 대하여 몰두하고 있음을 쉽게 보게 된다.

그러한 현실을 보면서, ‘기독교 영성’이 너무나 천주교의 영성 쪽으로 몰리고 있으며, 이그나티우스 로욜라의 영성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있음을 실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부분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진 개신교 목사로서 항상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천주교의 영성과 그의 영성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주도권을 분명히 믿지만, 동시에 우리들이 스스로 준비 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담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영성을 위해서 다시 행위와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듯 하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과연 ‘기독교 영성은 우리 스스로 개발 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잘못 알고, 잘못 이해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지면을 통해서 무엇이 옳고 그르고 맞고 틀리고는 따지려는 것이 절대 아니다.

개신교 목사로서 기존 영성 학자들이 이야기 하는 신학적 입장이나 천주교 적(로욜라 적)인 입장을 뒤로하고,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함께 나누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이다.

실제 삶 속에서 편안하고 여유 있게 펼쳐지는 그러한 기독교 영성을 소망한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함께 나누게 될 ‘기독교 영성’을 6가지 틀을 가지고 살펴볼 것이다. 1)예수 그리스도, 2)십자가, 3)복음, 4)생명, 5)기도, 6)성령, 5)열매 맺는 삶.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성을 소유한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이민 사회 속에 바로 된 기독교 영성의 확장과 그 능력이 우리의 삶 속에 편안하고 쉽게 펼쳐지며 자리 잡길 소망한다.

(2)
얼마 전 한 청년이 물었다. ‘기독교 영성은 분명히 성경을 근거로 하는 것으로 아는데, 성경에 영성이라는 말이 있나요?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가요?’ 여러분 같으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겠는가? 어떻게 보면 무지한 질문인 것 같으면서도 당연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질문을 받고 정말 성경에 ‘영성’이라는 단어가 있는지 궁금해 졌다. ‘영성’이라는 단어를 2곳에서 발견을 했지만(대상16:19, 시105:12), 여기서 사용된 ‘영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적다, 매우 작다’는 뜻으로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아니었다. 

우리는 과연 ‘영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 성경 구약과 신약 원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라틴어에서>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말은 라틴어 ‘스피리투알리타스’(spiritualitas) 번역이다. 이 단어는 영어, 불어, 독일어, 등 현대 서구어에서 거의 비슷한 형태로 내려오면서 사용되고 있다. 이 단어 어원은 ‘스피리투스'(spiritus) 이다. 그 뜻은 ‘숨, 호흡, 입김’이나 ‘대기 중에 있는 공기, 연한 바람’, 등을 뜻한다. 이 단어는 동시에 ‘신(神)의 입김’이란 뜻인 ‘영감'(inspiration) 뜻으로 사용된다. 때문에 이 단어에서 파생된 형용사인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는 ‘영으로 채워진’, ‘영적인’ 등의 뜻이 있고, 이 단어 명사형이 우리가 말하는 ‘스피리투알리타스’, 즉 ‘영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틴어 성경에는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 즉 ‘영성’이라는 단어가 없다. 그러나 이 단어 뿌리인 ‘스피리투스’와 형용사 형인 ‘스피리투알리스’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때문에 신구약에서 이 두 단어에 해당하는 단어를 살펴보면, ‘영성’에 대한 성경적 배경을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구약에서 ‘영성’에 해당하는 단어는 ‘루아흐’와 ‘네페쉬’이다. 이 단어는 ‘영’이나 혼, 또는 ‘영혼’으로 번역 되었는데, 라틴어 ‘스피리투스’로 번역돼 있는 단어이다. 단어 상으로 ‘루아흐’ 뜻은 ‘호흡, 생명, 바람, 정신, 공기, 영혼’ 등 뜻을 가지고 있고, ‘네페쉬’는 ‘욕심, 생명체, 인간’을 의미한다. 이 두 단어는 영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을 나타낼 때 혼합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네페쉬’는 ‘육신’을 말하는 히브리 단어 ‘바사르’ 반대 개념이다. 때문에 ‘네페쉬’는 정신, 영혼, 마음, 등 뜻으로서,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것에 생명을 주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루아흐’는 인간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숨’이다. 곧 만물을 살리는 힘, 또는 하나님 영으로 이해돼야 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원래 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 원형인 ‘스피리투알리스’(spiritualis) 또는 ‘스피리투스’가 ‘호흡’, 또는 ‘신의 입김’을 뜻한다는 것과 의미가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구약에서 ‘영성’이라는 단어는 ‘네페쉬’보다는 ‘루아흐’와 같은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이 그리스어로 번역될 때 ‘루아흐’는 에 해당하는 단어는 ‘프뉘마’이다. 그런데 이 ‘프뉘마’ 역시 ‘바람, 호흡, 생명, 영혼, 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사도바울에게서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고전2:14, 롬8:5, 갈5:16, 등등). 이 때 ‘영적’, ‘성령’등 단어가 나타나는데, 여기에 바로 ‘프뉘마’가 사용되고 있다. 

이처럼 라틴어와 구약과 신약에 나타난 ‘영성’에 해당하는 단어를 보면서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본다. 1)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는 ‘루아흐’와 ‘프뉘마’라는 것으로서, 분명히 성경적이다. 2)‘영성’이라는 의미의 ‘루아흐’와 ‘프뉘마’는 ‘공기, 숨, 생명’이라는 뜻 외에, 어떤 무엇인가를 살게 하며 그것에 영향을 끼치는 실체적 존재를 의미한다.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는 ‘영성’이라는 단어는 우리 노력이나, 나 자신에 의해 길러지고 이뤄지며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어떤 근원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영성’은 그 단어 의미 상, 인간이나 어떤 생명체를 살게 하는 근원인 것이다. 

📍기독교 영성 정의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기독교 영성’ 정의를 조심스럽게 내려본다(물론 개인 입장에 따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독교 영성이란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삶’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교훈과 가르침과 삶을 따라가는 것이 기독교 영성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기독교 영성은 성령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분명 우리 노력이나 힘이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음에는 구체적인 기독교 영성에 대해 알아 볼 것이다.

(3)
이미 지난 글에서 조심스럽게(나름대로) 기독교 영성이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이다’고 정의를 내려 보았다.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는 ‘기독교 영성은 성령의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가르침과 삶을 따라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라가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참 목표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시작을 위해서는 ‘복음의 핵심’이 꼭 있어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 영성을 말하기 전에 분명히 먼저 정리 해야 할 두 가지를 말하고 싶다. 먼저는 복음의 핵심이 정리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음은 임마누엘의 견고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가? 개인에 따라 그 표현이 다르겠지만, 6가지로 말하고 싶다. 

1)하나님께서 죄로 영원히 죽게 된 당신의 자녀를 살리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성육하셨다는 분명한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2)그 하나님께서 인간 예수 그리스도로 오시되 영원한 생명과 풍성함을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고, 분명히 부활하셨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어야 한다. 죽으심과 부활하심은 추상이나 개념이나 이론이 절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인류의 눈앞에서 일어났던 ‘실제’이다. 

3)그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변화된’존재가 아니라,‘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창1:27), 새롭게 창조된(고후5:17), 하나님의 자녀(롬8:16)’라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 

4)우리는 하나님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친밀한 가족이라는 분명하고 선명한 기준을 가져야 한다. 

5)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안에 성령이 계셔서(요14:17),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고 계심을(마28:20) 분명히 해야 한다.

6)우리는 그 예수 안에서 하늘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살아가는 목적 있는 존재라는 수준 높은 하늘의 가치기준을 자신해야 한다. 

적어도 이러한 복음의 핵심을 분명히 믿고 확신할 때, 우리는 기독교 영성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부담 없이 말하며 실천할 수 있을 것이라 본다. 이러한 기본 없이 기독교 영성을 말한다는 것은 지식과 이론에 불과 할 것이며, 실제 삶에서 적용될 수 없는 ‘사람의 영성’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시작을 위해서는 또한 ‘임마누엘’의 견고함이 있어야 한다.

기독교 영성을 시작하기 전 또 하나의 기본 전제는 ‘임마누엘’의 견고함이다. 하나님 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시간과 공간과 상관없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없으면, 기독교 영성은 얼마든지 개인의 수고와 노력과 자기성찰과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인간의 부산물로 여겨질 수 있다. 기독교 영성은 ‘임마누엘’이 절대적으로 전제 되어야 한다. ‘임마누엘’이 핵심이 되는 그 자리로 들어가야 한다. 그때 진정한 영성의 싹이 돋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영성의 기본이 되는 ‘임마누엘’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나는 가? 임마누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나타나는 영원함이다.

1)과거 - ‘에벤에셀’로 임마누엘 하셨다. 
블레셋의 공격으로 이스라엘이 큰 위기에 처하자 사무엘은 온 백성들을 미스바에 모이게 하여 하나님께 제사(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드리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그 위기를 마무리 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셨다. 그때 사무엘은 미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취하여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불렀다. ‘여호와께서 여기 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삼상 7:12/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가로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 

2)현재 - ‘살롬’으로 임마누엘 하셨다. 
미디안 족속에게 압제 당하는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께서 어느 날 기드온에게 나타나 ‘너는 큰 용사이니 일어나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기드온은 ‘나는 극히 약하고 힘도 없고 잘난 것도 없고 우리 집안도 별 볼일 없는데 내가 감히 어찌 그런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한다. ‘과거에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임마누엘 하셨는데 왜 현재는 임마누엘 하지 않습니까? (삿6:13)’라는 항변이었다. 

현재 자기가 처한 처절한 삶의 자리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너무나 간절히 소원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말씀하신다.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한다.’삿6:18절에서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여기에서 내가 너를 기다리마” 라고 친밀하게 말씀하신다. 기드온은 감격하며 돌로 제단을 쌓았고, 그 제단을 여호와 살롬이라고 불렀다. 곧 ‘하나님은 평강이시다. 하나님은 평강으로 지금 여기에 나와 계신다”고 감사하며 기뻐한 것이다. 

현재 삶이 치욕스런 삶이라 할지라도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있음을 기드온은 분명하게 경험하고 확신한 것이다. 

*삿6:24/“기드온이 여호와를 위하여 거기서 단을 쌓고 이름을 여호와 살롬 이라 하였더라 ......” 

3)미래 - ‘이레’로 임마누엘 하신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은 아무 말 없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드리려 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분명히 아셨고 이삭 대신 준비된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게 하신다.(창22:12-13)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양을 잡아 하나님께서 제물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 땅을 ‘여호와 이레’라 불렀다. ‘여호와 이레’라는 말은 ‘여호와께서 준비 하신다’는 뜻이다. 

아브라함은 어느 정도 ‘여호와 이레’를 확신하고 있었는가? 이삭이 죽어도 하나님은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히11:19). 아브라함은 확고부동한 ‘여호와 이레’의 임마누엘을 누리고 있었던 것이다. 

*창22:14/“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이렇듯 하나님의 임마누엘이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계속 지속되고 있음을 믿고 확신할 때 기독교 영성을 시작할 수 있다. 

우리 안에 복음의 핵심이 있는가? 우리 안에 임마누엘의 선명하고 분명한 기준이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기독교 영성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에 글에서는 ‘예수님의 영성’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